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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⑥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 영 주 목사“교적부와 교구 회복, 경쟁에서 협력으로 전환 계기 될 것”교회 간 경쟁은 하나님·이웃 사랑 새 계명에서 멀어진 탓교단·교회 공동의 과제로 인지하고 함께 논의해 가야위기에 몰린 한국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교적부'와 '교구'의 실현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총무를 맡고 있는 김영주 목사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 경쟁관계에서 협력관계로 전환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면서 “공교회성 회복에 있어 교적부와 교구문제를 붙들었다는
기획특집
공동취재=양승록·정찬양 기자
2012.06.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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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③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 성 돈 교수“못자리 망가뜨리면 결국 다 망하는 것”경쟁관계 극복 위해서는 목회자 수급 문제를 해결해야교적부·교구 회복을 위해 감당할 기구 부재… '난제'교회 성장 이후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모든 잠재력을 하나님나라 백성공동체로 전환하는 교회신학, 교회구조, 그리고 목회패러다임을 수립하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섬기고자 설립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목회자의 재교육 및 훈련, 교회 본질에 접근한 목회 등을 위해 주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나님나라 백성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는 실천신대원의 전임교수인
기획특집
공동 취재= 양승록·정찬양 기자
2012.06.1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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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회는 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힘차게 활동하시는가에 있다”교회가 자신을 위해 존재할 때 인간 집단화 된다예수님의 고난, 몸된 교회를 위해 내 몸에 채워야그리스도인 연합, 서로의 짐 나누어 갖는 것이어야1. 한국교회 청소년들의 고민 / “어느 교회를 가야 하나요?”2. 교회란 무엇인가?3. '교적부'와 '교구' 회복 / 교단과 연합기구에 묻는다.4. 하나님의 몸체인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교회란 무엇인가?신앙의 과정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내면의 갈등에서 오는 문제로 고민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 신앙
기획특집
공동 취재= 양승록·정찬양 기자
2012.05.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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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회원들과 함께(1970년 초).하나가 된 두 바보가히 최진삼의 결혼식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것이었다. 연회(宴會)를 뺀 식순에 의해 걸린 시간만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 장장 다섯시간 동안 계속 되었으니.한다하는 이들의 주례사, 축사, 격려사들이 쏟아졌지만, 그날 1948년 10월 26일 이후 함석헌이 육신의 삶을 마감하고, 이 땅을 하직한 1989년 2월 4일까지 최진삼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말씀'은 함석헌이 전해준 것이었다.'잽새'의 이야기에 또 하나 최진삼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었다. 역시 한 예화를 들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2012.05.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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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선택, 교회 체질 약화시키는 주범'교적부' '교구' 등 신자 실명화와 교회 간 공교회성 회복 시급1. 한국교회 청소년들의 고민 / “어느 교회를 가야 하나요?”2. 교회란 무엇인가?3. '교적부'와 '교구' 회복 / 교단과 연합기구에 묻는다.4. 하나님의 몸체인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본지는 창간 35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오늘날 위기에 봉착한 원인과 해법 모색을 위한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성장위주의 경쟁구조(만연한 수평이동, 하나의 상가에 2개 이상의 교회가 들어서는
기획특집
양승록 기자
2012.05.2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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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함석헌 선생과 함께 한 최진삼 장로(왼쪽에서 세번째).세상일을 다 벗고평양대동 경찰서에 수감된지 두어달쯤 될 때부터 함석헌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리 눈물을 쏟는 때가 많아졌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딱히 그 자신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이 땅에서의 일'은 끝났다는 것이었다.생각하는 사람, 생각으로 하는 사람 노릇이야 이후에도 '더욱 깊이, 더욱 높이, 더욱 뜨겁게, 더욱 참되게 계속 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적어도 크다 작다, 잘됐다 못됐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묘사되는 따위의 일들은 더이상 그 자신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2012.05.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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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1∼14).자동차 대절하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각 지교회 순회를 제대로 못해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어서 오토바이로 포카라에서 9시간 정도 와서
기획특집
편집부
2012.03.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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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유영모와 함께 한 함석헌 선생. 사진 왼쪽은 당시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유영모의 '어둠'유영모(柳永模)는 함석헌이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까지 무릎을 꿇고 대하는 유일한 스승이었다.“내가 언제까지 선생님의 제자노릇을 해야 하는건지…”하며 답답해 하는 때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1940)나, 이제나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권위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유영모에게서 편지가 온것이다. 더군다나 이 편지는 그 달(1940년 8월) 성서조선(聖書朝鮮)에 발표되는 동시에 함석헌에게 우송된 것이었다. 〈저녁찬송〉이라는 제목의 글로 '숨 너머 편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2.03.2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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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편집장 박선균(오른쪽), 백청수(왼쪽) 님과 함께 한 함석헌 선생.송산(松山)학원역사의 제물로 운명지어진 '함석헌의 나라'가 열려오기 시작한다. 함석헌이 이제 '평양의 송산'을 향해 오산을 아예 떠나게 되는데, 필자가 송산(松山)을 '함석헌의 나라'라고 표현한 것은 그곳이 함석헌의 인생살이 90평생에 유일하게 그의 이름으로 가져본 꿈의 터전이었다는 것 때문이다.함석헌은 송산을 향하면서 전신을 떨었고, 떨면서 갔다. 송산, 그곳은 실로 그에게 약속의 땅이었다. 국가권력으로 일으켜지는, 군사과학 산업기술 등으로 일컬어지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2.02.2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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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는 제자들(왼쪽부터 서영훈, 최진삼, 이태영 변호사 외 여러분들).김태훈과 함석헌, 그리고 송산 농산학원송산고등농사학원을 경영하던 김두혁이 동경농대의 진학을 위해 떠나게 되면서 송산학원을 인수해 경영할 인물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김태훈은 마치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태훈 군은 그의 친구들과는 유(類) 다른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농과대학의 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농사(農事)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품고 있는 터였다. 그는 수업 중에도 거의 주말마다 동경교외의 농촌을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2.01.2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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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한 〈씨알 모임〉에서 씨알을 말하는 함석헌 선생.성지(聖地) 용골들녘오산학교를 사임하고, 오산학교에서 용골(龍滑)로 넘어가는 언덕기슭에 자리한 함석헌의 농장은 그가 시대를 넘어, 종교계(界)를 넘어 그 자신의 하나님 '역사와 참'을 만난 곳으로 함석헌이 씨알(民衆) 철학을 창도한 이후 그를 따르게 되는 후학, 후진들, 제자들에겐 마치 성지(聖地)와 같은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이곳이 그가 내촌을 향해 아주 분명하게 '나, 함석헌'을 선언한 곳일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그가 그렇듯 솔직히 믿어온 조직기독교(組織基督敎)로부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12.2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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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동 소재 자택에서의 함석헌 선생.함석헌에게는 이미 농사와 교육과 신앙을 하나로 묶은 공동체를 통해서망해버린 나라를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명(mission)'이었다고 까지 단언한다죽기로 사는 사람뒷줄을 끊어버린 사람! 예수가 그랬던 것 같이 함석헌이 그랬다. 악의 세력이 걸음걸음 접근해올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곧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살아남는 몸이란 절대의 혼이 빠져버린 고깃덩이일 뿐이다. 역사진화의 절대조건은 '참', '뜻'에 제물로 드려지는 인격이다.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2011.11.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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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저지를 위한 모임에서 함석헌 선생(사진 왼쪽부터 예춘오, 문동환, 박형규, 계훈제 선생 등과)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표지의 노트를 받아든 김태훈은 받아들고 나서는 어쩔줄을 몰랐다. 감히 그 노트를 자신이 한번보여 달라고 했고, 그래서 받아든 것임에도 두서너장을 넘겨봤을 뿐 눈앞이 캄캄해 왔다. 이제는 어서 돌려드려야 되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었다. 그때 함석헌은 다시 방긋이 웃으면서 조용히 태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네. 선생님!”태훈군은 그 노트를 다시 함석헌이 내민 손에 내어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11.0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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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바니아 펜들힐 퀘이커 수련원에서의 함석헌 선생(사진 오른쪽).함석헌이 '선한 목자'를 하늘에 서원했을 때부터 그의 생의 주제였던 고난(苦難)이 그의 살 속에 혼 속에 깊이 서리기 시작했다. 함석헌의 일생엔 두 가지 주제가 있었다. '참'과 '고난'이 그것이었다. 생명이 생명됨에 있어 혼과 육이 합일되어 가능하듯이 이 참과 고난이 함석헌을 함석헌으로 살게했다.그가 오산학교에 부임하던 첫날, 요한복음 10:11∼15절까지의 성경말씀을 읽고 나서 부임사를 했는데, 함석헌이 이 부임사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한 서원이 '선한 목자'였다.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09.2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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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함께(박정희 군부 통치시대).무국적의 떠돌이자신을 구타해놓고 도망쳤다가 이튿날 '선생님'을 다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울며 용서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이유, 어떤 경우의 폭력도 범죄'라며 엄히 꾸짖은 함석헌은 학생들이 돌아간 후에 도 울고 또 울었다. 그때만이 아니었다. '선한목자'로서의 오산 10년 세월이 그랬고, 38년 오산을 떠나 47년 분단 사선을 넘었으니, 오산을 떠난 이후에도 지속된 일제치하 8년에 북한 공산치하 2년을 더한 제2의 10년이 또한 그랬다.아니, 함석헌은 아예 '우는 자'로 세상에 왔다. 일제의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08.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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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도 오산학교 1학년 갑조반 담임이었던 함석헌 선생과 학생들.내촌에게서 세례를 받고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3일째 되던 3월 17일(1928), 내촌(內村)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당시의 교회법 때문에 영원히 '교회의 사람'이 될수가 없었다.당시 교회법에 12살이 돼야 받을 수 있었던 학습을 함석헌은 의젓한 아이로 소문이 나 9살에 받을 수 있었는데 세례는 그러지를 못했다. 세례는 온 가족이 다 믿어야만 받을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함석헌의 부모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가 동경사범에 재학중일 때였다. 그는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2011.07.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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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모임〉에서 함석헌 선생.아버지 전도 일념으로 성경 소리내 읽어… 장로돼자신 안에서 찾고 또 찾고, 내촌 통해 새신앙 얻어함석헌은 아홉살에 교회 학습을 받았다. 12살이라야 받을 수 있는 학습을 9살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할 뿐만 아니라 '참 잘믿는 아이'로 교회의 어른들로부터 한결같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세례'는 부모님들이 다 믿어야만 받을 수 있다는 교회법 때문에 끝내 받지 못하고 말았지만 열여섯살 까지는 정말 철저한 '교회신앙' 속에 자랐다. “내가 만일 인도에서 나서 힌두교에 입회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2011.06.2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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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55주 기념강연회 함석헌 선생 강연 모습.함석헌, 동경고등사범에 진학하다그 무서운 관동대지진을 겪은 함석헌은 다음해 1924년 동경고등사범 문과에 합격하게 된다. “한해를 준비해 가지고 명년에는 꼭 어디나 입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도 놓지 못하고 지냈다”는 그 한해를 넘어 대학을 진학하게 된 것이다.스물네살이 되는 해였다. 제대로였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도 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럴수 없었던 것이 함석헌만이 입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깊은 학문을 대하기 전 하나님은 함석헌으로 알찬 씨알로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05.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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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수호협의회의 성명서를 검토하고 있는 함석헌 선생.1923년 9월 1일,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그 관동대지진은 다시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요 재앙이었지만 함석헌에게 있어서만은 그것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은혜의 선물이었다. 오직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생각하는 사람'으로 함석헌을 키우기 위해 하늘이 그 사건을 준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물론 없는 것이고, 또 그런 하나님이실리도 없을 것이지만 그 형언할 수 없는 재앙이 함석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인(刻印)되어졌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이처럼 고난에서 뜻을 찾는 역사(役事)가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04.2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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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추모의 밤에 함석헌 선생.'역사의 사람'이면서 희한하리만큼 `생의 수평선'을 기리는 함석헌에게 있어 1923년 일본의 관동 대지진은 하늘이 베푼 오롯한 은혜였다. 적어도 함석헌에게는 말이다. 죽을 때까지 참을 이루기 위해 거짓과, 의를 구현하기 위해 불의와 빛을 이루기 위해 암흑과 그리고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생(生)을 수호해 내기 위한 싸움에 선택된 인격인지라 함석헌에게는 죄의 바다에서의 세례가 요구되었다.악한 것 보다 더 악한 것, 못된 것 보다 더 못된 것, 더 악할 수 없고 더 못될 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기획특집
생명교회 원로/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목사
2011.03.28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