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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노 시몬스(1496~1561)가 1536년 사제(신부) 직을 던져 버리고 재세례파에 합류했다. 뮨스터 교구의 ‘재림예수’ 운동의 파행으로 재세례파 모두에게 매우 불행스러운 오명이 주어졌으나 시몬스가 등장하여 활동하면서 재세례파는 완벽에 가까운 중흥기를 맞이했다.오늘날 세계 침례교 연맹(BWA,Baptist World Alliance) 산하 신자가 4천만명인데, 그 첫 번째 신자가 멘노 시몬스의 제자인 얜 문터(Jan-Munter)의 빵집에 몸을 의탁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토마스 헬 위즈(Thomas Helwys)이다.헬 위즈
선교
조효근 목사
2014.07.0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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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 아미쉬 공동체는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차밍 넨시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했다. 그들이 대서양을 건너 온 이야기가 한스 제이콥스 카프만의 약식일기로 남아 있다. 이 부분을 먼저 여기에 옮겨 본다.6월 28일 로테르담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데 나의 전불리가 숨을 거두었다. 그를 로테르담에 묻고 우리는 그 다음날 29일에 출항했으며 하루 반나절이 지나자 바다가 잔잔해졌다.7월 7일 이른 아침에 한스 짐머만의 사위가 죽었다. 우리는 7월 8일 영국에 도착하여 9일간 부두에 머물렀으면 이 기간에 다섯 명의 어린이가 죽었다. 7
선교
조효근 목사
2014.07.0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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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들 중 ‘메노나이트’는 교회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겸한 개혁파 교회를 이끌고 있다. 지난주까지 소개했던 ‘후터라이트’는 공동체운동을 원칙으로 하여 사명을 다하려 하고 있다.오늘은 ‘아미쉬 공동체’를 소개한다. 아미쉬인들은 독일, 스위스, 알사스에서 살던 사람들이 심한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737년 최초의 아미쉬 공동체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 란카스타 시에 정착했다. 이어서 1815년, 1860년 추가 이주민들이 유럽을 떠나 미국행을 결행했다.또 아이오와 주에 1846년에 세 가정이 정책했다. 그러나 아이오와 칼
선교
조효근 목사
2014.06.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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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사람들은 1세기 크리스천들이 실행했던 것처럼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나눔 공동체다(행 2:43~4:32). 그러나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말은 매우 싫어한다.그들은 공기, 눈, 비, 땅, 물과 같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개인의 소유나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원리를 따라서 그들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물적 재산도 개인 소유가 불가하다.그러나 그들의 신앙과 교리의 핵심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에 근거한다. 후터라이트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선교
조효근
2014.06.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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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설립자: 이그나시우스 로욜라)가 주변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후터라이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광분하고 있었다.예수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책들을 몰수하기 위하여 후터라이트 마을들을 동시다발로 공격하였다. 역사와 신앙고백, 설교 자료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나 문서들을 없애버리면 후터라이트의 개종이 훨씬 쉽다고 판단했다. 그때 가톨릭의 사냥개 노릇을 했던 예수회의 공격을 피하여 벽 속에 숨겨두고 회반죽을 발라둔 책들이 3백여 년 지난 오늘날 발견되기도 한다.가톨릭 예배에 참석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대상은 아이들이 먼저였다.
선교
조효근
2014.06.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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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로 호칭해왔던 기독교 개혁파들은 AD 1648년 신ㆍ구 기독교 전쟁 전과 후로 그들의 역사와 운명을 나눌 수 있다.후터라이트 공동체의 기록은 1648년 헝가리에서 추방 또는 로마 가톨릭 귀화로 일단 그들의 17세기를 정리하였다.프로테스탄트 개혁 선언의 해인 AD 1517년 이후 신ㆍ구 기독교는 AD 1618년부터 30년간 서로 교회 빼앗기 전쟁에 몰두했다. 그 여파로 그들의 교세 쟁탈전과 상관 없이 신앙의 진실을 찾아서 현실의 안녕을 포기하고 고난의 삶을 선택한 후터라이트 사람들은 신·구교 교회 빼앗기 전쟁과 전투현장에서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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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를 따라서 재세레파 기독교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내는 자들을 보라. 한스 크랄은 타우피스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아주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그는 형틀로 온 몸을 잡아늘이는 아주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기 조직도 발설하지 않았다. 크랄은 또 성답 밑에 자리한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그곳은 아주 습하고 물기까지 많았다. 그의 옷이 썩어갈 정도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굴복하지 않으니 출감시켰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개인별 소개를 하려면 끝이 없다. 많은 후터라이트 형제들의 줄기찬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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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후터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라비아를 떠나기로 하였으나 대부분 모라비아에 머물렀다. 후터의 동료이자 선교사였던 피터 보이트는 1534년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에겐부르크에 있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발목과 손목은 쇠고랑으로 단단히 채워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통을 당했다. 그는 자기의 발톱을 갉아먹는 쥐떼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훗날 그는 석방되어 후터라이트 형제단에 합류했으나 쥐가 뜯어 먹은 후유증으로 두 발을 잘라야만 했다. 그는 공동체 활동을 하다가 1570년 숨을 거두었다.박해를 견디지 못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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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가 기독교일 수 있다. 아니다. 기독교다. 교회가 국가 되었고, 그래서 국가 또한 교회다. 이는 로마제국 교회의 형식이다.이 법칙에 따라서 개인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는다. 개인은 교회에 헌금하듯이 국가에 세금을 낸다. 재세례파 영웅적 리더들이 핍박과 학대로 순교하면서 더욱 가혹해진 핍박을 피하여 스위스 재세례파들은 모라비아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곳 리흐텐스타인(Liechtenstein) 지역의 영주들이 재세례파들을 보호해 주었다.이 소문이 전해지자 티롤, 오스트리아, 스위스 및 독일 지역에서 쫓기던 재세례파들이 몰려들었는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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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노 시몬스(1496~1561)가 1536년 사제(신부) 직을 던져 버리고 재세례파에 합류했다. 뮨스터 교구의 ‘재림예수’ 운동의 파행으로 재세례파 모두에게 매우 불행스러운 오명이 주어졌으나 시몬스가 등장하여 활동하면서 재세례파는 완벽에 가까운 중흥기를 맞이했다.오늘날 세계 침례교 연맹(BWA,Baptist World Alliance) 산하 신자가 4천만명인데, 그 첫 번째 신자가 멘노 시몬스의 제자인 얜 문터(Jan-Munter)의 빵집에 몸을 의탁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토마스 헬 위즈(Thomas Helwys)이다.헬 위즈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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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만츠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그는 5개월 정도 감옥에 있다가 탈옥했다. 이듬해인 1526년 10월 다시 붙잡혀 취리히 의회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츠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림마트 강에 던져졌다. 형 집행자들은 만츠의 두 팔을 등 뒤로 잡고 차디찬 강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재 세례 주장자들을 비웃는 행위였다. 그러나 펠릭스 만츠는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갔다.만츠는 같은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되는 개혁자들로부터 죽임 당한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재세계파는 급속한 박해에 휘말렸다.정부나 가톨릭은 물론 프로테스탄트
선교
조효근
2014.06.1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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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마의 멸망(AD 476년)세계 기독교의 매우 주요한 갈림길이 보인다. 일반사에서 서로마의 멸망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게르만 장군 오토 아케르가 로물루스 11세에게 권좌를 내놓으라 했던 AD 476년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멸망에 대한 역사정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마는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이전에 이미 사망 예비 진단서를 받았었다. 사분오열 된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대전투까지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 깃발을 들고 전투에 임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전환한다.승자의 영광을 마음껏 누
선교
편집부
2013.01.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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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파, 또는 로마교구, 또 다른 표현으로는 서방 기독교나 교황권파로 표현할 수 있는 서유럽 기독교는 AD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제 1대 교황으로 역사 기록을 하는데, 기독교(신교)에서는 그레고리 1세를 제 1대 교황으로 인정한다. 로마 가톨릭의 기반이 되는 서방 교권은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 1세의 새 인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1. 암브로시우스 교회권 상위를 위한 공헌암브로시우스는 시 행벙관 출신 밀라노 주교로 활동할 때 교회권이 황제권 우위에 있다고 강수
선교
편집부
2013.01.0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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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거스틴의 영향력펠라기우스는 아담은 죽을 운명의 사람으로 지은 바 되었기에 그는 그 자신에게만 해를 끼쳤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난 사람마다 아담과 연결시킬 수 없다. 아담의 죽음과 또 그의 죄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복음 뿐 아니라 율법도 인간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예수가 세상에 오기 전에도 세상에는 죄 없는 인간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펠라기우스가 아니라 그의 친구이며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의 신학이었다.AD 415년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코엘레스티우스의 신학을 정죄하였다. 복음의 기초를 부정하
선교
편집부
2012.12.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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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거스틴의 신학적 발전어거스틴이 자리 잡기 이전 로마교회는 도나투스 파의 순정적 신앙에 휘둘리는 교회들의 분위기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다.어거스틴은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한 카르타고의 주교 아우렐리우스(Aurelius)와 협력하여, 무엇보다도 우선 아프리카의 교회들만이라도 강화하고 통일하려고 노력을 했다. 동시에 도나투스 파와 로마 교회 사이에 분열의 동기와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접근해 갔다. 조심스럽게 도나투스 파 지도자들과 토론하고 논쟁을 하였다. 신학적 논문으로 대응하면서 접근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쉽지가 않았
선교
편집부
2012.12.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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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롬은 여생의 마무리를 위한 예루살렘을 선택한다. 그의 친구인 파울라와 그녀의 딸 예우스토키움이 그곳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하나 지었다. 하나는 파울라가 직접 관리하는 수녀원, 또 하나는 제롬이 지도하는 수도원이다. 제롬은 여기서 성경 주석과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하면서, 차츰 그의 옛 스승이기도 한 오리겐에 반대하는 학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제롬의 옛 친구인 루피누스와의 관계가 대립으로 치달으며 둘의 논쟁은 오리겐이 가진 사상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으로 흘렀다.제롬의 역작으로 그의 이름을 천세에 빛나게 한 불가타(Vulga
선교
편집부
2012.12.0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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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구가 주도하는 라틴교회는 차츰 그들의 독자성을 확보해 간다. 그들은 제1차 니케아회의(AD 325∼)에 대의원 파송에서 소극적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교리사상을 지켜내는 뚝심을 발휘했고, 제3차 에베소 공의회(AD 431년) 때도 불확실한 교리학 배경을 지닌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를 원격 조정하여 그들에게 버거운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꺾어, 이단정죄 추방을 하였다.그리고 제4차 칼케돈 공의회(AD 451∼)에서 라틴 사학에 기초한 일명 '칼케돈 공식'을 창출해 냄으로 견고한 로마식 라틴 기독교를 출하하게 된다.아리
선교
편집부
2012.11.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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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25살에 당시 40살인 큰 사업가로 과부인 카디자와 결혼을 한다. 생활환경이 안정된 무함마드는 본격적인 종교수업을 계속한다. 들과 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일, 성지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구하는 등, 그는 그가 고민하고 있는 신앙의 과제에 계속 몰입해 간다.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대속의 메시아인가? 하나님은 유일하신 오직 한분이 아니고 성부·성자·성령으로 신이 셋이라는 가르침 앞에서 그는 안타까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길이 막혀버렸다. 고뇌 깊은 날들은 가고, 그는 어느 날 평소에 잘 가던 히
선교
편집부
2012.11.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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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 위에서 아라비아 땅 만큼 수난의 깊이를 더한 곳은 없을 것이다. 유배지. 저주 받아 형극의 길을 가는데, 역사의 저버림을 받고 떠난 그들일지라도 길어야 한평생이다.그런데 아라비아는 동일한 형벌로 2천년 이상 저주와 형극의 땅이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쫓겨난 이스마엘,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이스마엘의 친동생인 이삭의 큰 아들 에서(에돔)의 자손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영원한 저주와 형극의 날을 살아가는 곳이 아라비아였다.그리고 무함마드가 탄생한(AD 570) 날이 왔다. 그
선교
편집부
2012.11.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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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570년 메카의 중심부를 포위하는 에티오피아 군대가 밀어닥쳤다. 에티오피아는 예멘 땅에 기독교를 강화시켜 아라비아를 공략해 볼 계획을 가지고 침공했다.에티오피아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고 메카를 위협하였다. 메카 주민들은 피어오르는 모래구름과 에티오피아군의 함성소리에 질려서 그들의 허약한 외곽성벽을 바라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해군 함대가 갑자기 메카에 도착하였다. 사산조 호스로우 1세는 아덴만에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해군을 파견하였는데 바로 그때 에티오
선교
편집부
2012.10.29 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