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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은 AD 476년 게르만 장수 오토아케르에 의해 도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장시키면서 무너졌다. 제국의 역사는 그러나 우물쭈물, 역사학자들의 자기 혼돈이 물려준 유산이기도 하다.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구분이 콘스탄티누스 등장 이후 사라졌으나, 기독교를 무리하게 로마 국교(AD 392년)로 삼은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두 아들 중 형인 아르카우스에게 동로마를 맡기고 동생인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를 맡겼다. 10세 미만의 두 아들에게. 아들에게 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나 7살 짜리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
선교
편집부
2012.10.1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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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로마교구의 실체동로마 교구가 자연스럽게 분리 되었다. 5세기 말 현재, 예루살렘,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천도(수도를 옮김)한 AD 330년 자연스럽게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탄생했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로마 제국의 중흥조인 콘스탄티누스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서)로마 교구와 동로마 교구의 충돌이 있게 된다. 황제가 교회의 교리 선택권에서 중립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기에는 야심이 너무 큰 황제였다. 그래서 제국, 황제, 종교는 각각 '하나' 여야 한다는 과욕을 부렸다. 그러니 황제에게 빚
선교
편집부
2012.10.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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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칼케돈 공식'이라고 할만큼 힘들게 싸웠던 교리 투쟁이 일단락 된 회의가 제4차 칼케돈 종교회의(AD 451년)였다. 이 회의를 마무리 지은 후 기독교 역사는 '칼케돈 공식'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로마 교구식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정형(正形)의 탄생을 말한다. 물론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에도 교리 시비가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로마 교구'가 만족하게 되면서 대세는 방향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성령론 문제에 있어서만은 '니케아 신조'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플 등 후일 동로마파로 분류되는 측과의 갈등은 여전했
선교
편집부
2012.09.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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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콘스탄티노플 교구콘스탄티누스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자유령(AD 312년)을 밀라노에서 선포하기까지 '역사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와 어떤 밀약은 없었을까? 기독교 세력의 묵시적 동의 없이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깃발을 걸고 막센티우스와 대회전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당시 카타콤 기독교 내부에서는 10년만 더 로마제국과 싸웠다면, 싸우지 않고 버티기만 했었다면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역사 무대에서 기독교는 황제의 지상권을 제어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를 탄식
선교
편집부
2012.09.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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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서 유럽시대가 온다500(AD) 년대의 로마 제국과 기독교를 말 할 때, 우리는 '콘스탄티누스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는 제국의 통일, 통일황제, 통일된 유일 종교를 사는 날까지 간절히 원했다. 그가 니케아 회의(AD 325년)에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단 하나의 기독교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애착을 가졌고, 그의 신앙 모범이었던 아리우스파(단성론으로 분류)를 정통 기독교와 교류시키지 못했다.제 1차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포함한 그들은 이단 정죄가 되었고, 그들의 문서들은 파기 되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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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8.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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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회의를 끝내면서 기독교는 새로운 다짐을 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등장과 제국 역사 무대의 동반실력자 된 기독교의 150년 정도(AD 313∼476년) 정도를 요약정리 해 볼 필요가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매우 치열하고 절박한 투쟁을 해왔다.콘스탄티누스의 경우는 쇠망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을 재흥시켜보려는 충심과 야심 성취를 위하여 지하종교인 기독교를 합법화 시킨 후 재국 중흥의 동반자로 대우했다.그는 제국은 하나, 황제도 하나, 종교도 하나 라는 숭엄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 갔다. 제국은 통일 황제권 단독강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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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2012.08.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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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회의(AD 451)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주체 또는 실재는 신적인 로고스임을 재확증하였으며 동시에 성육신에서 오직 하나의 주체는 두 가지 독특한 존재방식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나 그러나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로써 로마교구(교황 레오 1세)는 교리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그 승리는 정치적 승리로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 당시 칼케돈 공의회는 법령 제28조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 교구에게 로마교구와 동일한 특권을 부여하였다(콘스탄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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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8.0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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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안디옥 교구 감독에서 제국교회 제 1인자의 자리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 올랐다. 때는 AD 428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Ⅱ세의 총애를 받은 그는 총대주교좌 착좌 제 1성으로 '황제여, 제국교회 안에 숨어 있는 이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황제 앞에 무릎 꿇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는 전언이 있다.필자는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취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고 늘 생각해 오고 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루스에게 그가 무너지는 것을 볼 때 덕스러움이 약간 부족한 인물이
선교
편집부
2012.07.0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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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상 네스토리우스 제자들이 AD 451년 에뎃사를 출발하여 아시아 선교를 시작한 후 그들의 선교가 바그다드로 일단 철수 했던 AD 1409년까지 1천여 년 정도 아시아 선교에 맹렬한 투혼을 발휘 한 역사가 묻혀버린 채 세월이 흐르고 있다. 왜,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 추방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버렸을까?1.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교리시비를 위한 에베소 회의제 3차 국제회의(AD 431년)가 지금의 터키 에베소 마리아 예배당에서 열렸다. 알렉산드리아 교구 대주교인 키릴루스(AD 444년)가 고소자요 콘스탄티노플 교구 총대
선교
편집부
2012.06.1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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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25년 로마제국 교회는 니케아(현 터키의 이즈닉)에서 제 1차 회의가 열렸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가 된 이후 12년 차에 제국 안에 있는 교회가 각 지역 별 신학적 차이로 말미암은 분쟁과 분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그의 포부는 제국은 하나, 황제도 한 사람, 교회도 통일 된 신학의 터 위에서 하나를 지향했다. 그러나 300여년 역사를 가진 교회는 여러 형태의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양성론과 단성론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 성격을 말하고 그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신학의 성립과 불성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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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5.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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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학파의 큰 인물인 터툴리안의 신학과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개종한 씨프리안(Cyprian)이 그 사람이다. 씨프리안은 북아프리카 카테지에서 부유한 로마의 관원을 아버지로 하여 AD 185∼200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헬라의 교육을 받으며 문학, 수사학, 법률, 행정의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중년기에 이르러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는데 개종하게 된 동기는 터툴리안의 저서를 공부하면서였고, 또 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경건한 그리스도교 장로 캐시릴우스의 영향으로 성서 탐구에 열중하였기 때문이다.그는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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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5.1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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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은 성처녀 마리아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메시아 예수를 탄생시킨다. 출생과 동시에 헤롯왕의 살해 음모를 피해서 이집트 피난 이후 30여세에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는 3년 활동을 끝으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정을 밟는다. 그해 오순절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완전을 이루었다.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난해성 교훈을 교리로 내세우면서 오랜날동안 사단의 세계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사단의 1차 전술과 전략은 하나님이 성육(Incarnation)을 방해했고, 성육하신 하나님의 세상에 오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2012.04.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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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투스(본도) 아시아 출신 마르시온유럽과 아시아로 세계사를 대표하려는 기독교 2세기 중엽에 기독교의 앞날에 결정적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먼저는 마르시온(Marcion)을 주목하자.기독교의 이단들은 니케아 1차 회의(AD 325년) 전후로 많이 등장하지만 특별히 마르시온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시온은 인간 이성을 기초로해서 그를 관찰할 때 그는 매우 진실하고, 그 신앙 열정을 높이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과 역사 위에 등장한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성급하고 이를 신학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소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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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2012.03.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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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가 AD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로마제국 수도를 옮긴 후, 로마 제국교회의 기류가 다라졌다. 콘스탄티누스 주변으로 철새형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같은 조짐은 콘스탄티누스가 AD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 후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제국의 힘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遷都)한 후부터는 힘의 쏠림이 심해졌다.그 실례로 니케아 제1차 회의(AD 325년∼) 전 과정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니케아회의 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권과 교회의 권위 사이의 구분도 못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하였고, 318명의 정통파 대의원들
선교
편집부
2012.03.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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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은 욕심도 많다. 그들의 제국교회를 구분할 때 서유럽과 동유럽교회 또는 서로마와 동로마교회로 구분하는 것으로 끝내야지, 동로마교회를 동방교회로 구분하는 행위는 착오라고 정리를 해주어야 한다.세계 일반의 표현가치로 볼 때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범주 안에서 서로마와 동로마로 구분해야지, '동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된다. 로마교회는 그들의 정통적 교리한계를 벗어나면 무조건 '동방'으로 몰아부치는데 이는 옳지 않다.본디 초기(고대) 기독교에서는 동방을 두려워했던 듯 하다. 그 두려움은 경멸로까지 발전하여 자기들의 문화적 열
선교
편집부
2012.02.2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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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10년 경 북메소포타미아 고대 앗수리아 영토에서 태어난 타티안(Tatian, AD 110∼180년경)은 뛰어난 성경학자이며 언어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금욕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는 로마 유학을 떠나 정통주의 변증학자인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제자가 되었다.그는 스승 저스틴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hus Aurelius) 황제 박해 때 채찍에 맞고 목잘려 죽임을 당하자, 그 자신이 학교를 열었다(AD 165년경).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AD 172년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2012.02.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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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 시대의 연장선에서 볼 때 기독교는 차츰 사상적 틀을 만들기 위해서 고심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황금기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기독교는 사상적 몸부림을 한다. 성령강림 후 50여 년 로마교회도 활발한 세력 확대를 노린다. 그러나 얌니아 회의(AD 90) 후 유대교가 자기 갈 길을 가면서, 초대교회와 결별하면서 기독교 또한 바쁘게 되었다.기독교는 스스로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 순간 내게 힘이 너무 없구나를 깨닫는다. 더구나 영지주의(Gnosticism)와 에비온 주의((Ebionism)가 골치였다. 이들은 헬라주의와 유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2012.02.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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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해시대의 종결디오클레시안 황제 사위로 황위에 오른 갈레리우스는 그의 장인 황제는 물론 역대 황제들의 통치 방편이었던 기독교인 길들이기를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런 그가 통치 8년째 되어 갑자기 박해를 거두었다. 갈레리우스는 무서운 질병에 걸렸다. 종양이었다. 창자가 썩고 그 냄새가 진동하여 사람이 가까이 하기에도 힘들었다. 애꿎은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했다고 구박을 받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갈레리우스는 자기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에 대해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것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2012.02.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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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차 박해3차 박해의 성격은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분위기였다. 3차 박해 기간을 AD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선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1, 2, 3차라는 박해의 흐름이 일관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이기 때문에 2차와 3차는 서로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3차 시기로 분류되는 AD 202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2년 연속 박해가 이집트 지역에 집중되었고, 그 이후 등장한 알렉산더 황제를 이은 막시미누스 황제는 작심을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막시미누스 황제의 극심한 박해는 전임 황제 알렉산더의 비밀스러운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2012.01.20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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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은 기독교 형성사의 꽃 중의 꽃 같은 시대였다. 이 기간은 기독교의 성격이 형성되고, 그들이 지닌 위엄에 찬 신앙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또 흉내내기도 어려운 긴 고난을 승리로 이끌었던 빛나는 시대였다.앞서 밝힌대로 제국의 힘, 곧 가이사의 이름으로 시작한 박해는 네로와 도미티안 시대(AD 64∼AD 97) 약 30여년 이지만 네로가 실각한 뒤 베스파시안과 그의 큰 아들 티투스의 시대(AD 69∼,AD 79∼81)는 숨고르기라고 할까 조금은 틈새가 주어졌다. 그러나 디투스가 통치 2년으로 병사한 후 그의 동생 도미티안
선교
본지 발행인 조효근 목사
2012.01.11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