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1960년 4월 19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독재정권의 불의에 항거하여 궐기한 10만 민중의 자발적인 대정부 시위는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로를 열어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4·19혁명이 오늘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4·19공로자회 이기봉 회장(64·사진)을 통해 그 역사적 맥을 따라간다. 당시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 2학년이었던 이 회장은 자유당 정권 시기를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황 극심, 사회 전반의 가치체계 혼돈의 때'였다고 회상한다.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맞이한 8·15광복,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 등으로 국민들의 상황은 최악에 달해있었다. 그런 만큼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 대한 기대심이 높았을 것. 그러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계속된 국민경제의 불안한 상황은 실업문제로 직결됐고, 거기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노린 부정선거는 그동안 쌓였던 국민의 울분을 터뜨리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4·19혁명정신을 단발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닌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 시점을 찾는다.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일어난 동학운동 역시 민주와 자유에 대한 민중의 절실한 운동이었으며, 한일합방 이후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어난 3·1운동도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민중운동이었다. 이처럼 나라의 주권 회복과 인간의 민주·자유에 대할 갈망으로 인한 고귀한 정신적인 힘이 면면히 이어져 4·19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민중의 거국적인 궐기를 이뤄냈던 4·19혁명의 힘을 12년간 독재 정권을 이끌어 온 이승만 정권교체 이후 구체적인 결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당시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학생들이었고 이들이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후 정권의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4·19를 혁명으로 봐야 하는지 그 표기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4·19혁명이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민주주의 빠른 실현을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같은 이유로 4·19혁명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동안 과도기를 거쳐 민주주의의 확립을 기다려야만 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발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 4·19당시 정부와 민중의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지켰던 군이 최초로 지배력과 힘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년간 민간인에 의해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지만 군은 혼탁한 정치질서를 이유로 정전탈취를 시도, 결국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배경이 되었다고 이 회장은 말한다. 이후 군부독재가 들어섰고 사반세기 가까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 회장은 4·19의 정신이 그대로 끝이 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4·19혁명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면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개발연대시대에 중심인력으로서, 경제 역군으로서의 양심적인 경제활동에 진력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으며, 경제사회의 초석을 다지는 등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회장은 또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이라는 지적에 대해 1960년 혁명을 일으킨 1차적인 목적은 이승만 정권의 교체였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민주'와 '통일'에 있었다고 말한다. 민주통일에 대한 염원은 남한만의 것이 아닌 한반도 통합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사학재단의 민주화운동을 펼치면서 국민 전체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위해 농촌계몽운동, 민중의식운동 등을 펼치는 한편 남·북한 청년학도들에게 문제의식을 고취시키며 `남·북 학생운동'을 돌출시켰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결실을 맺기 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리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굴욕적 한일회담에 항거하는 1964년 6·3운동을 일으켰으며 이후 군정반대로 이어지는 등 저항정신의 명맥을 면면히 이어왔다고 말한다. 이 회장은 당시 4·19혁명의 정신이 구체화 되지는 못했지만 순수성에 있어서는 다른 혁명과 차별화되는 것을 강조, 현재도 진행 중인 진정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여전히 국민들의 정신적 힘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 회장은 앞으로 “인식의 갈등, 사회문화의 이질감을 해소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4·19를 제2의 혁명의식, 민족의식으로 부활시켜야 하며, 이는 남·북을 막론하고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남한 내에서 진·보수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보면서 “통일국가 형성에 있어 4·19혁명정신이야말로 민족통일국가에서 정치사상의 기본개념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정신을 통해 인류에게까지 봉사하는 국가와 민족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람을 피력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4·19혁명전선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은 어느덧 60을 훌쩍 넘어 머리 희끗한 노인이 되었다. 이제 그 4·19의 정신적인 힘을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대의 사명으로 남겨져 있다.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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