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구체적인 기독교의 과오

무함마드는 종교적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15살 무렵부터 기독교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사실상 기독교 신자나 다름이 없었다. 낙타몰이꾼이 되어 메카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오고 가는 장삿길에서도 시간만 있으면 그는 교회당으로 가서 사제들을 만난다. 그래서 그를 찾다가 없으면 교회에 가보라고 했다. 가족들이 가보면 언제나 무함마드는 사제의 발 앞에 공손히 앉아서 가르침을 받곤 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함마드가 고민에 빠졌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는 물론 무함마드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기독론’을 소화(이해)해 내지 못했다. 그 누구도, 어느 신자도, 사제도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이시니 그가 나(무함마드)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그의 나이 40살 될 때까지. 기독교는 아직도 이슬람에게 예수께서 이슬람에게도 구세주이심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간격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두 종파의 화해는 물론 좋은 날을 장차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중세 기독교의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던 날의 과오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4세기에서 7세기,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역사의 날들을 살아오고 있다.
기독론이 무엇인가?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사람, 사람의 모습이시나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갈 2:20)이라고 단호하게 고백해야 한다.
바울의 이야기이다. 바울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이 말씀을 읽어 보라. ‘내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어찌 바울뿐인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전문가들(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껍데기는 아무게이지만 그 속에 예수께서 살고 있음을 확인(자인)해야 한다.
예수가 신자(내)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세계(왕국, 나라)에서의 책임과 권한은 모두 그들에게 있다. 필자는 이슬람 이전의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한 아라비아(요르단, 시리아 포함까지) 일대에서는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이었고, 또 책임지대였다.
이렇게 말하면 발뺌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은 그건 그렇지만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은 무함마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필자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 되묻자. ‘그럼, 그때 무함마드와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나 사도들, 속사도들, 교부들, 그리고 카타콤 그리스도인들만큼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삶을 살고 있었던가?’
오죽하면 무함마드가 등장하여 이슬람을 만들어 오늘의 기독교 갈 길을 막아서게 된 현실을 말하면서 그 시대 기독교가 외도하여 낳은 사생아가 무함마드라는 악담(?)까지 필자는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답해야 한다.
성결대 교회사 강의, 들소리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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