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아시아 역사 찾기 ④

우르무치 시내로 나갔다. 날씨가 쌀쌀했다. 돈황과 서안의 날씨와는 달랐다. 주거지 난방은 10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15일까지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공산주의 시대의 계획생활의 습관을 지금도 따른다. 해발 1천미터가 조금 더 되는 사막과 초원의 북방지대이니 공기가 청명할 듯 했으나 겨울 난방이 시작되면 대기권 공기가 급격히 나빠진다. 석탄(유연탄)을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염이 심하다고 한다.
우르무치 고고학 박물관으로 갔다. 신강 자치구의 수도. 신강 자치구 인구는 1천만여 명이지만 중국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북방 위구르인들이 60%, 한국이 40%이며 신앙은 위구르인들은 95%이상이 이슬람이다.
중앙 아시아와 중국령 신강(위구르) 지역은 당나라 고선지 장군과 아라비아 이슬람의 탈라스 전투(현재 우즈벡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접경지)에서 고구려 2세였던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가 대패하여 쫓겨가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와 신강지역의 이슬람 세력의 고착화이다.
그시대,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승리했더라면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신강지역 쯤은 당시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가 강세였으니 중앙 아시아와 그 변경의 지역에는 기독교가 생존했을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그 속에 오묘를 담고 있다. 역사의 뒷면(또는 이면)을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기독교로 이어오는 하나님의 섭리속에 갑자기 뛰어든 7세기 초(AD 610년)에 나타난 이슬람이 기독교의 앞길을 가로막을 줄 누가 예측이나 했으랴.
기독교의 출발점을 살펴보자.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여 오늘의 `유럽기독교'를 이루어 냈는데 당시 페르시아와 로마의 접경지인 에뎃사(오늘의 터키산 우르파)에서 유럽파보다 훨씬 크게 일어났던 히브리파 디아스포라와 기독교가 동북방으로 진출했던 아시아 기독교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라비아 이슬람에게 영토를 내주자, 중앙아시아와 중국령으로 쫓겨가듯이 진출해 갔으나 모처럼 자리 잡은 기독교가 또 중앙아시아에서도, 신강지역에서도 내륙으로 떠나야 했다.
그렇다면 중앙아시아나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 기독교와 이슬람이 부딪치고 마주하는 곳마다에서 기독교는 이슬람의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답변해야 한다.
위구르 지역, 중국의 정책에 따라서 현재 신강지구는 한족(漢族)의 대대적인 이주로 말미암아 전체인구의 40%인데 앞으로 한족이 위구르 이슬람 인구를 수년내에 압도할 것이다.
신강지역은 중국의 이주 정책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슬람 위구르의 약세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강 지구는 타마르칸 사막이 그 중심에 자리잡은 남방의 사막 북방의 초원으로 되어 있다지만 남북한 전체의 7배정도 되는 광역이니 인구 증가는 아직도 여유가 있다. 한족은 1천만명 더 이주시켜도 비좁지 않을 터전이다. 그러면 위구르 이슬람이 중국인의 과반수 미만이 될터이니 기독교의 활동이 더 좋아질까?
아니다. 이슬람은 기독교가 반드시 뛰어 넘어가야 할 벽이요 안고 가야 할 부채가 된다. 피할 수 없다. 우르무치 박물관은 중국의 한개의 성(省)에 불과했으나 지난달, 그러니까 9월의 카자흐나 키르키스, 그리고 우즈벡 수도에 있는 국가 단위의 박물관 보다 훨씬 그 규모나 작품 수량이 많고 다양했다.
고고학 박물관 진열대 사이사이에 있는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네스토리안의 유품들을 찾고 있는 중이다. 있다. 작품이 있다. 네스토리안의 십자가가 있다. 하나뿐이 아니다. 돌판에 새겨진 그들의 십자가가 있다. 돈황 박물관에서 보았던 연꽃의 틈새에 자리잡은 십자가가 아닌 저들의 당당한 신앙고백을 담은 십자가였다. 눈물이 핑돈다. 어찌된 눈물인가? 십자가의 감격이 아니라 십자가로 신앙고백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지불했을까 하여 아픈 내 마음속에서 흐르는 십자가 눈물이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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