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이슬람^유대교의 대화요청 - 
 
   지난주 이 지면을 통하여 2008년 1월까지 팔레스타인 국의 평화안을 마무리 짓고 싶다는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외교적 열망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방법으로 하자. 정치인들이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모조리 `가이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세계사 격동의 모든 과정을 보라. 로마가 지배하기 전까지는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이사'가 메시아로 받아들임으로 기독교는 정치와 종교의 양자관계를 절충식 또는 역할 분담식으로 조종하기도 했으나, 종종 종교와 정치 관계에서 `상황'을 무시함으로 종교와 정치의 상호불간섭주의를 불러들여 하늘과 지상의 권력기능을 조정하고 이 세상의 평화를 지켜내려는 하나님의 생각을 기독교는 포기했고 그 결과 로마제국의 약화를 불러냈다.
중세기 초 기독교의 잡스러움 때문에 탐욕은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이 등장하여 기독교의 지분을 절반이나 가져갔으며 유대교와의 불편한 관계 역시 해결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그 비극이 이어져 오고 있다.
골치아픈 중동문제를 정치로부터 떠맡겠다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동문제는 종교문제이다. 종교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정치판에 방치해 둔다면 기독교는 `직무유기'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위에 등장하신 이후의 세계사는 무조건 기독교에게 일차 책임이 있다. 하늘나라와 지구상의 모든 문제는 기독교의 양 어깨에 메어 있기 때문이다. `절대종교'인 기독교, 그것을 운용해 가는 기독교인들은 인류 현장의 제반사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는 자들이다. 만약 이에 대한 자부심을 포기할 마음이 있다면 기독교인의 기득권을 먼저 거두어야 한다.
이같은 자세전환을 확실히 해낸다면 기독교는 세계 분쟁이나 빈곤 등 비인간적 현실들을 해결해낼 수 있다. 그리고 분쟁과 빈곤문제는 반드시 기독교가 해내겠다는 소명을 각오해야 한다.
이사야의 글 2장을 펴면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가 인류의 메시아로 오시기 전 7백여년 쯤에 등장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기에 넉넉한 준비기간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가 오셨으나 인간의 지혜가 하늘의 요구를 따르지 못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예수의 3년 지상생애의 말씀은 모두 복음서 안에 보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이라 하신 예수의 지적 중 `아직도'는 어느 시기를 말하는가? 성령 강림의 때를 구분하면 되겠는가? 사도행전 성령 강림은 예수 부활 직후인 AD 34년 이전이고 4복음서의 완성은 AD 60년 경 시작하여 AD 100년 경까지인데 요한복음 16장 12절의 `아직도'는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또 주께서 `말씀'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신 부분이 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한복음 21장 25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이 내용들을 오늘 이 시간의 지면에서 다 풀어낼 수 없다. 또 우리 크리스찬은 예수의 영(성령 하나님)을 받은자들이니 필요한 삶의 지시(가르침)를 순간마다 주께로부터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도'의 시간은 개별 숙제로 남겨 두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분쟁과 빈곤, 특히 팔레스타인 민족이 국가 설립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부터 취급해 보자. 세계가 아는대로 1948년 유대인들이 신생 `이스라엘'국가를 팔레스타인 민족이 2천여년 간 살아온 바로 그 터전위에 세운다면서 칼과 창으로 그들을 추방하였다. 그후 60년이 지났는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 무조건 자기들의 옛터라고 하면서 무력으로 점령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가? 그럴수는 없다. 그런 논리로 한다면 대한민국이 중국을 향하여 무력을 행사하여 우리의 옛터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를 점령해 들어간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 큰 전쟁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2천여년 전에 살았던 터전이면 사실상 원인 무효가 된 옛날 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럽인들의 힘을 빌려서 치고 들어갔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간의 분쟁이다. 지금까지 정치 논리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종파의 협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신자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고 있으니 종교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나 정치가 나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종교 쪽이 더 순수하고 안정감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저들의 문제는 종교에서 시작되었기에 종교로 풀어내야 한다. 종교가 나서면 자칫 더욱 복잡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하는 이들이 전면에 나설 경우, 서로의 전문성 때문에 오히려 쉽게 풀어낼 수도 있다. 또,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자기네 고유의 역사와 혈통을 상기하게 되면 의외로 각자가 더 큰 소득을 얻어낼 수 있다.
나는 바란다. 설사 부시 대통령의 정치기술보다 더디고 부족할지라도 종교 문제로 파생된 중동문제를 종교 전문인들이 나서서 대화를 하는 길을 연다면 첫째, 무력사용을 자제할 것이며 둘째, 자기들 종교의 근원이 한 사상, 한 믿음, 한 사람 아브라함에서 출발했으며 그들 모두의 아비가 아브라함이니 아브라함의 꿈(理想, vision)은 나의 꿈임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그러므로' 서로 싸우고만 있어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역사와 사상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더 큰 포부의 성취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종교가 무엇이냐, 아브라함이 누구냐, 하면서 함께 오늘의 중동아시아에 빈곤과 분쟁으로 죽어가는 자식들(인류)을 구원할 대안을 찾아나서는 일이 급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같은 요구에 `좋습니다'하면서 동의할 종파가 없겠으나 그래도 기독교나 기독교에 준하는 이슬람과 유대교는 험로, 곧 가시밭길 같은 화해와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종교는 본디 고급철학이다. 고상한 삶을 추구해야할 셈족의 종파들이 서둘러야할 가치가 분쟁해결과 빈곤퇴치가 될 것이다.
새해의 포부는 분쟁과 빈곤을 얼마만큼 극복하느냐에 있다. 기독교가 우선 나서야 하겠다. 힘들다고만 하지 말고, 교회 돌보기도 벅차다고 투덜대지 말고 한 발 더 나가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예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 골고다 직전 감람산 기도나 겟세마네의 고통의 시간이 너무 힘들어 피같은 눈물 쏟으면서 그래도 가야할 골고다를 향하시는 예수처럼 팔레스타인 분리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기독교 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 다음 행동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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