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립은 위대한 개혁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종교개혁 16세기 이전의 인물이기에 비중을 작게 잡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그의 업적과 또 개혁의 포인트를 볼 때 크게 값을 매겨야 한다. 그는 해박한 지식, 명석한 사고력, 진리를 주장할 때 보여주는 확신, 나아가서 진리를 옹호하는 강한 자신감을 보면 16세기 개혁자들 중 그 누구와 견주어도 한 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적으로 몽매하던 시대였고 도덕성이 바닥을 헤매던 시대였으나 그의 삶은 언제나 순결하고 투명하였으며 근면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같은 위클립의 신앙자세는 많은 감동과 감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오직 성경을 번역하여 그것을 널리 보급하며 성경을 하급 신자(하급 신자라는 말은 옳지 않다. 당시에도 이따위 표현이 가능했으나 오늘날의 정서로는 옳지 않은 표현이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은 위클립의 성경 반포가 단순하다면 단순한 행위에 대해서 큰 성과를 내게 하였다. 설교를 한다거나 성경을 연구하는 등의 방법보다 직접 성경을 신자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만족한 열매를 맺게 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성경을 신자들이 많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일만으로도 복음 전도의 효과를 크게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도움으로 크게 빛을 발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넓혀주고, 이해력을 강화시켜 주며, 판단력을 키워 주었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 순수함 때문에 많은 도움을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다. 성경을 존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만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성경 말씀을 전해들으며 은혜를 받는 경우는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등의 방법에 비하여 훨씬 더 순수함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당시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감추는 교회 귀족들은 저들도 덩달아 성경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성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귀족도, 왕족도, 왕비도, 국왕 마저도 성경의 권위를 소홀히 하는 태만하고 무례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국 권력자들(국왕과 귀족들)이 교황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함께 무지와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개혁자들을 핍박하고 학대하였다. 위클립을 따르는 이들에게 엄격하고 까다로운 간섭을 하여 지치게 하고 변절케 하기도 했다. 위클립은 그러나 대항하였다. 그리고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친히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위클립의 성경을 통하여 영적 발전을 조금 얻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성경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제한된 지식만 알고 있었다. 마치 사도 시대의 성도들 처럼 한계를 느꼈다. 어떤 이들은 사도 시대의 성도들이 매우 활발한 신앙지식을 터득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 그렇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사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온전하게 표현되기 이전이었다. 복음서의 기록은 AD 50년대 후반에서 시작하여 10여년 동안 집필되었으나 그것도 지극히 제한된 글의 분량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 다수는 말씀에 굶주리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증거가 사실일 경우 오늘날 신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위클립은 죽었다. 그러나 그에게 향하는 분노는 결코 시들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40여 년 후에 콘스탄티스회의 결의에 의해 그의 유골을 꺼내어 불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 위에 던져 버렸으며, 그가 쓴 책들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의 육신이나 개혁의 업적인 책들이 불태워진 `재'는 시내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드디어 세계인의 가슴으로 흘러가서 진리의 야무진 씨앗이 되어 주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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