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도 어려운 말씀들

 금식하는 일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음식먹는 것을 차단하고 중단한다는 것은 이 세상과 결별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함 또한 이 세상에 기반을 두지 않겠다는 당사자의 의지로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보물을 하늘에 쌓는 마음의 저변을 살펴보기로 한다.
 금식할 때는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 하나님 앞이 어디인가, 가장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장소, 인적이 드물거나 혼잡이 차단된 공간을 확보하여 가능한한 타인들이 모르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금식'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스스로 선택을 했거나 몸에서 음식을 받지 않아서거나 간에 입으로 먹을 것이 안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음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그 당사자는 세상과 결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맺은 인연, 주어진 혈연까지도 모두 마감해야 하는 숙연한 시간이다. 그그래서 심각한 시긴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금식이 말해진다. 고대 종교 이래로 인간은 신(神)의 뜻과 자신의 정신적 향후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극단의 수단으로 금식을 택해왔다.
 그런데 금식과 단식이 본래는 구분되지 않았으나 현재의 경향은 구분할 수밖에 없다. 금식을 말할 때 그 뜻이 모든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음식에는 죽, 미음, 음료수, 과일즙, 물까지도 금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하는 금식에 물은 물론 갖가지 첨가물이 함유된 과일즙 등 까지도 음식에서 제외하고 있으니 금식은 기독교인들의 용어로 하고, `단식'이라는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하게 되었다.
 단식은 심할 경우 자연수, 즉 물까지도 사양하는 단계가 있다. 그러나 단수의 경우 탈수현상 때문에 5일 이상 버티기 어렵다. 그러므로 간간이 물을 섭취할 수 있는 정도를 `금식'이라 명명하고, 이 경우 20일 또 30일 이상의 단식이 가능하다.
 다시 금식문제로 돌아가자. 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른 금식을 요구하신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금식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며칠 금식하여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식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죽음을 마음에 두는 행위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금식 운운, 하지 말고 금식을 해야할 경우 그 타당한 이유와 명분을 충분히 확인하고 내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금식을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금식을 하면서 가능한한 주변에 알리지 말고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몸단장을 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흉칙한 모습을 하면서 은근히 자기가 지금 고통스러운 금식을 한다는 식으로 자기 행위를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예수는 금식행위를 상 받을 행위로 여기고 계신다. 왜냐하면 식음을 폐한다는 것은 죽음과의 거리를 압축시키는 행위이기에 때문에 비중을 크게 두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의 길을 말씀 하실 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하심을 보면 제자의 길을 매우 깊은 의미로 보셨다. 마치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실 때의 결단과 같은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이 말씀의 기준에서 `금식'이 거론되고 있음을 신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금식은 죽음, 자기포기로 직결되는 지름길임을 예수는 판단하고 계시는 것 같다. 만약 금식을 죽음으로 가는 예비 과정이요, 구도(득도)의 지름길임이라 판단하신다면 우리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금식기도를 가볍게 여겨, 함부로 행하거나 바리새인들처럼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크게 망령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금식할 때 금식일자나 회수를 자랑하는 행위를 일삼는 것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금식이면 전혀 첨가물이 없는 자연수만 마시면서 자기를 죽음같은 자리로 이끌어, 겸허한 마음 가짐으로 자기를 씻어내고 다스리는 자정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광맥을 찾은 광부가 정금을 캐내기까지 과정을 아는 사람들처럼 금식과 기도의 과정은 돌조각에서 정금을 캐내는 수고와 같은 비중의 수고를 해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위선은 참으로 무섭다.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하고 구미호가 천하일색 여인으로 변신할 수 있다지만 사람의 위선보다 그 피해와 위험도가 높을 수는 없다.
 위선은 설익은 음식과 같아 인체에는 소화 장애를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 사는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이 인간을 불신하는 비극의 환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냉소가 흐르는 등 매우 불유쾌한 도덕적 결함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하늘을 훔치려는 도적의 마음이 그 가운데 자리 잡혀 있기 때문에 그 흉물스러움이 더하다.
 창세초, 아담이 변명하면서 마치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뻔뻔한 모습을 보였던 점을 상기하면서 왜, 예수께서 금식하는 행위 과정에서 흉칙한 몰골을 하거나 슬픈 기색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일들을 꾸짖으시는가를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시장 어구에서 오래 기도하고, 성전에 나아가서도 하나님 저는 세리들과 다릅니다,를 자랑하면서 뻔뻔스러운 동작을 하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심을 상기해 보라. 위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자신에게는 물론 선량한 사람들에게나 다른 구도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를 말이다.
 요즘 한국 사회가 기독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음은 물론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기독교인들의 사회활동에 장애로 등장했다. 한동안은 기독교인들이 그 심각함을 몰랐는데 요즘은 알고 있다.
 비웃고 조롱하는 비기독교인들의 태도가 못마땅한가? 그러면 위선에서 신속하게 벗어나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내일 모레면 심판대에 서서 추상같은 심판을 받아야 할 신자들이 정직하지 않은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해댄다면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우리 기독교 안에서 정직한 삶의 자세를 위한 과감한 자기반성 운동이 일어났으면 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간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금식하지 마라. 은근히 자기가 지금 아무나 할 수 없는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있으며, 또 몇번째가 된다는 식의 표현을 삼가라.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하늘에는 녹이 슬지 않은 금고가 있고, 도적이 가까이 하지 못할 보안장치가 잘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말씀은 확대되어 재물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하여 말씀을 잠시 더 생각케 하는 시간을 주신다. 재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니 무슨 말씀일까? 녹슬지 않은 금고, 도적 없는 그곳을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을 것이라 하시는 뜻은 무엇일까?
 속도 빠르게 말씀은 달린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말씀은 다시 건너 뛴다. 하늘 창고, 눈은 몸의 등불, 그리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을 이어 주신다.
 그리고, 생명의 힘·생명의 신비·생명의 본질을 거론하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다짐하듯 말씀하신다.
 또 다시 생각이 난듯, 창공을 우러르며 `공중의 새를 보라!'하시며 감탄하신다.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이 부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기독교 초기의 틀을 마련한 선진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볼 일이다.
〈계속〉

※ [편집 주]필자가 세계여행에서 돌아와 급히 쓰면서 지난주 원고가 중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쓴 마태복음 5:16∼48 내용은 8월에 쓴 15일자, 22일자, 29일자(1119호∼1121호)의 내용과 달라, 비교해서 읽으면 더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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