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고 찾고 두드려 좁은 문 찾으라

 산상보훈이 마태복음의 독점은 아니다. 누가복음도 이를 언급한다. 누가복음 6장 27절 이하에 원수 사랑 부분 등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인물의 안목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탁월한 선택력을 그는 가지고 있다. 마태의 5장, 6장, 7장은 거듭 말하지만 높은 경지의 말씀들이다. 쉽고도 어려운 말씀이라고 필자가 표현하고 있는데, 쉽다는 것은 평범한 교훈(잠언, 도덕률)같으나 조금만 더 깊은 눈으로 접근하면 가히 절경에 솟아 있는 말씀들이다. 금강산, 가을에는 더 뽐내라고 풍악산이라 한다는데 가을철 금강산보다 더 기기묘묘한 말씀의 창고가 마태의 산상보훈이다.
 오늘도 쉽고도 어려운 말씀 하나를 보자. 먼저 `비판을 삼가라' 한다. 형제의 눈에 티는 보면서 네 눈의 들보를 어찌하려느냐고 주님은 안타까워 하신다. 비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비판'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 들보가 박힌 눈으로 타인의 눈에 티를 탓하는 인격이면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비판은 정당한 이성의 판단일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많이 일어나는 시비와 다툼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는 생각하지 않고 남을 탓한다. 들보가 박힌 눈으로 남의 눈의 티를 탓하는 행위는 `똥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랜다'는 옛 지혜의 말과 어울리면서 우리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온다.
 잠깐 지나쳐 가기에는 송구스러운 6장의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6장 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하여 23절에서 마무리 짓는다.
 여기서 `네게 있는 빛' 곧 `몸의 등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의 빛, 너의 등불이다. 이는 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성령께서 가까이 오고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례를 받은 사람을 지키신다. 십자가 세례 과정에도 참여하시지만 십자가를 이룬 성도의 가슴에 등불을 켜신다. 여기서 등불 또는 빛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진리'라 하겠다. 진리는 참이요 삶의 이치라 할 수 있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법칙을 아는 사람은 진리가 그의 발등을 지켜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이 말씀은 다시 들보로 눈을 가린 자, 심한 표현으로는 들보가 눈에 박힌 자는 진리를 식별하지 못해 그에게 주어진 빛(불)이 제 노릇을 하지 못한다.
 여기서 빛이 어두운 자, 눈에 들보가 박힌 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또 주 예수를 배반하는 자, 성경(구약)을 잘못 배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하면 되겠다.
 오늘의 현재에는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들이 눈에 들보가 박혀 있는 자가 된다. 성령을 받지 못하는 단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이다. 또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요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 그가 십자가의 대속죄를 이루신 구세주 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입으로는 대개 믿는다. 그러나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중에 배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가슴에는 불이 꺼진다. 불, 곧 성령께서 그들 배신자요 불신자인 자들 곁에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으시기에 눈에 들보가 박힌 자들은 성령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요 눈이 어두어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보가 들었으니 절벽이요 흑암이지 그 눈으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7장으로 되돌아 가기 전 성령의 불이 가슴에 켜지기를 원하면서 말씀 하나 더 살피고 가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먹을까, 마실까, 입을 까,에서 떠나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또한 성령의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내용이다. 26절 말씀에서 예수는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신다. 놀라운 표현법이다. 대개의 시인들이 쉽게 상상하고 상기할 수 있으리라 할 수도 있으나 시인의 노래와는 다른 삶의 진실을 통째로 말씀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동원하셨기에 우리가 놀라는 것이다.
 종교훈련을 하는 사람들 중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 종교(신앙)의 힘으로 세력을 이루고 싶어하고 또 하나는 자기 인연이나 혈연에서도 떠나려 하는 몸부림을 하는 유형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 모순이기도 하다. 종교의 본질은 절대자, 경전(말씀) 그리고는 선생과 제자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성경, 교회가 된다. 하나님이 계시고 성경이 있으면 곧이어 교회 또는 신자들이 형성된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도 현실에서 가르치기에 몰두했던 바울 같은 이가 있고, 가르침에 매우 신중한 요한과 같은 이가 있고, 더 심각한 이들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되었다.
 이 모든 대상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서 떠나 볼수 없겠느냐고…. 사막이나 굴속으로 떠나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려 하지만 하늘 새들처럼 넉넉한 살림을 할 수 있다고 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저 새들의 삶에서 인간이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저렇듯 가벼운 날개로 하늘을 날으는 새들처럼 탐욕을 훌훌 털어버리고,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서 한 발 비켜서는 사람이 되고 싶어야 한다.
 바로 이같은 마음으로 처세를 하면 그 눈이 맑아서 사물을 올바르게 볼 수 있다. 들보가 박힌 어둠뿐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캄캄한 밤이요 절망일 것이다.
 캄캄한 밤 같은 세상, 사물을 바로 판단할 수 없는 불안함, 그리고 자기 꼴을 모르고 있으니 남들만 탓하고 점잖을 빼면서 위선을 떨 것이다.
 외식을 하지 말자. 외식 또한 설익은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외식은 위선인데, 다른 표현으로 하면 설익은 음식과 같은 것이다. 설익은 음식은 쉽게 변질되고 몸에 탈이 나고, 어떤 것은 극심한 식중독 현상까지 생겨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들보의 눈으로 남의 눈에 있는 티 하나를 못봐주고 흉을 보고, 비난하고, 외면하면서 혼자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그러한 자들을 위선자라고 하는데 그들을 우리 사회는 싫어한다. 그래서 가끔씩 비난하고 조롱한다. 위선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기독교 신자들 중에 많이 있다. 일반인들이야 하늘에 죄를 지었다 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다 예약해 두었다고 믿으니 걱정이 없다. 또 날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을 삼으니 아는 것도 많아, 세상 사람들을 쉽게 생각할 수 있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혹시 내 눈에 들보가 박혀 있는가를 보라. 타인들을 쉽게 대하고, 남의 실수를 비웃고, 남의 무능을 비난하는 이들 가운데 들보 박힌 눈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다. 그놈의 들보를 빼내야 한다.
 들보를 빼내자. 외식하는 자여. 위선자들이여. 더 많은 죄를 진 자가 남의 콩밭에서 고구마 하나 캐먹은 사람을 쥐잡듯이 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기를 쓰는가.
 말씀이 다가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생각을 좀더 깊이 해야 한다. 단순히 누가 개·돼지 같은 수준이냐를 말하지 말고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어느 누가 주인공이 되고 또 개·돼지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기만 해도 두렵고 떨린다. 혹시 내가 개, 돼지에 해당하지 않을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손에 쥐고 개, 돼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지혜를 짜는 자는 누굴까?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씀은 눈이 없으면서도 우리(나)를 살피신다. 불꽃같은 눈이라 하시더니 성경의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렵고 떨리는 것은 왜일까. 누가 개요 돼지일까. 말씀의 오묘가 깊고 높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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