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다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라 “공관묵상”을 하고 싶다. 글의 시작 부분에서도 밝힌 바 있었지만 공관복음 전체를 한 눈에 살핀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4복음서 중 최초의 복음서로 인정하는 학계의 뜻을 따라 최초의 복음서가 지니는 단순 소박한 그 맛을 음미하면서 진행과정에서 마태와 누가복음의 특징을 살려내기로 한 것이다. 지난 7월 25일자(제 1117호) `공관묵상 〈8〉'부터 마태복음 5장, 6장, 7장으로 가서 말씀을 찾다가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권위를 살펴 보자. 일단,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전도, 곧 복음을 전하셨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을 개의치 않으신다. 가자, 우리가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신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에서 `축귀'라는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그의 걸음걸이 마다에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치료 받고 귀신의 사슬에서 해방을 받았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다.
 이상하게도 병을 치료하거나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나타낸다는 교회나 목회자들은 대개 `이단'이라는 멍에를 쓰고 제한된 활동을 하게 된다.
 귀신 쫓아내는 사람으로는 1927년 부터인가 이용도 목사에게 나타났던 은혜였다. 이용도 목사 역시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와 함께 당시 교회 (교단)들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었다. 1933년 33살의 나이에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는 무지막지한 구설수가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결별함으로 그는 자유로운 생명이 되었다. 세상이(교회가) 이단이라고 하거나 말거나 그건 그들에게 맡기고 그는 떠났다. 요 근래에 와서야 이용도를 이단에서 풀어준다고 야단들이던데 이단 만들고 풀어주는 일 또한 교회들의 할 일인 모양.
 병든 자를 치료하기는 길선주, 김익두 목사 등 한국의 초기교회들 중 다수의 목회자들에게 나타난 은사였다. 요즘은 귀신 쫓는 능력을 발휘하다가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가 이단의 족쇄에 끌려 있고,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는 특히 만병의 치료에 특별한 은사를 발휘하면서 또 이단의 사슬에 걸려 있다. 그밖에도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걸려들기 쉬운 함정인 병자치료와 귀신 쫓는 일을 행하다가 곤욕을 치루고 있다.
 그러나 지적을 당하는 당사자들 가운데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지적하면 `그런가요!' 하면서 자기 살핌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성락교회나 만민중앙교회의 경우, 그들 자신은 물론 한국교회에 권위있는 어른들의 기구나 기관이 없어서 고생들이다. 좀더 일찍이 80년대나 90년대 중반 쯤 해서 잘못 되었거나 낯설은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고 함께 가는 길을 열어 볼 수 있었다.
 본문으로 돌아간다. 현대교회는 병자 치료와 귀신 축출의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교회에 병자와 귀신들린 자가 가득하다면 심한 표현일까?
 보라.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다가 귀신 들린 자와 마주친다. 귀신의 눈으로 보니 예수가 보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니이다.
 귀신의 수준이면 예수가 보인다. 예수 신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본문의 귀신들린 자는 증거하고 있다. 많은 세상의 사람들 중 아직도 예수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대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의 수준을 밑돌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치료

 본문 29절에서 우리는 좀 더 심각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앞서 특정교회와 그 목회자들 실명을 거론한 바 있으나 왜, 오늘의 교회들은 대다수가 병고침과 귀신 쫓는 일을 혐오할까? 대다수의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귀신 쫓는 능력과 병 고치는 권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현대 교회들이 귀신과 병의 현대적 의의는 알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가 고침받아야 할 것들 중 낯 익은 몇가지를 떠올려 보자. 사회 정의, 평화의 갈망, 빈곤, 인종차별, 성차별 등이 현대사회의 질병이다. 이 병들 중 어떤 경우는 질병과 귀신의 합병증세도 있다.
 질병과 귀신의 반란은 불평등 사회, 폭력과 전쟁, 굶주림과 인간 차별, 성차별 속에서 마음껏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악성고난이다.
 우리 사회가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본문 1장 33절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깜짝 놀랄만한 인물의 등장으로 갈릴리가 술렁거리고 `곧' 열리고 있다. 마가는 `곧'(at once)이라 하여 긴박성을 느끼게 한다. 15절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라 하시는 예수의 억양도 숨가쁘게 들려오는 것은 필자의 느낌일까?
 시대의 절박한 고비를 소홀히 넘기지 말자. 예수가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 매달리니 마치 무당이나 되는 줄 착각하지 마라. 예수를 만나는 감격으로 술렁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방 갈릴리가 치료 받고 구원을 받는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앎으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 1:34).
 마가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이 이미 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출발한 마가의 눈에는 매우 역동적인 세계가 병자를 고치는 기적과 행함과 귀신잡는 능력을 발휘한다. 오늘의 교회들 중 병자 치료와 축귀를 현대 용어로 변경하면 사회불평등, 폭력과 전쟁, 기아와 죽음, 인종차별, 성차별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서 이단 대접을 받는지도 모른다. 해당 교회나 장본인들이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과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평등, 굶주림과 차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또 행동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새벽 깊은 시간의 기도

 기도의 힘이 있어야 한다. 예수는 밤이면 감람산 뱃바게에서 늘 주무셨다. 유대땅의 밤은 춥다. 더구나 감람산은 해발 800m가 더 되는 곳으로 밤이면 무척 춥다. 왜, 예수는 집이 없을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 예수는 집이 없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돌바위를 침대 삼아 주무시거나 엎드려 기도하시는 일이 예수의 밤과 새벽의 시간이었다고 우리는 믿자.
 그리고 우리는 자신, 특히 목회자의 지도력이면 그 눈물겨운 인고(忍苦)의 기도 시간을 통하여 각종 질병과 귀신에 사로 잡혀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자들을 치료하자.

다른 곳으로도 가자

 사도 바울은 특히 결벽증이 있었고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오늘 우리의 38절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거듭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 하나가 끼어 든다. 남의 교회 신자 훔치지 말자. 남의 교회 신자 도둑질 하지 말자. 오늘의 교회 형편들을 보면 신자들이 `수평이동'을 한다는 용어가 있다. 골라서 입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닌다고 한다. 그런 신자들을 얻으면 좋아서 입이 째지는 목회자들도 있다.
 더 이상 그러자 말자. 신자가 돈이냐? 금덩이냐? 다시는 이같은 일이 한국교회 안에서 수근거리는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승려들과 절에서 신자 쟁탈하던가? 진실로 부끄러운 줄 알자.
 가자! 다른 곳으로 가보자. 나는 전도하러 이 세상에 온 예수니까. 〈본지 발행인〉
[정정] 지난 주 내용 중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아랍어”가 아니고 “아람어”로 정정합니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