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선택하시는 예수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아가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무리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이끄는 힘에 따라서 온 것이다. 예수는 말씀을 베푸시면서도 또 다른 제자를 찾고 계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가.
 예수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눈여겨 보시면서 그와 평생 동행할 제자를 찾고 계셨다. 예수의 말씀대로이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모두 거치면서 찾고 계시는 것이다.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았다. 깊은 눈으로 보셨다. 사람보는 하나님의 눈이다. 레위는 `마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며, 저가 장차 큰 제자가 될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예수께서 세관 앞을 무심코 지나치신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의 시간은 제자를 찾고 있는 시간이다.
 이미 공생애에 드셨으니 제자를 길러야 했다. 제자를 찾는 스승의 단계는 그의 경지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임을 감안 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 확정된 이상 그에게는 시급하게 제자가 필요했다.
 세례자가 확실한 눈으로 보았다. 그는 메시아를 발견했다. 메시아를 그의 육안으로 볼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선지자였다. 세례자의 증언이 옳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속죄단 위에서 희생되어야 할, 이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기로 작정된 어린양이었다.
 예언적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신자이면 세례자와 같은 눈을 가져야 하고, 예수와도 같은 눈을 가지면 더욱 좋다. 단 한마디로 넉넉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표현도 좋고 바로 그가 머지 않아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 바쳐질 인류구원의 희생이신 예수임을 발견하는 세례자의 눈을 정확했다.
 예수께서 레위(마태)를 보셨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를 한 번 보고 싶었던 삭개오 못지 않은 열망을 가진 레위를 만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듣는 즉시 마태는 예수께로 향했다. 이 과정을 누가복음은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8)하여 보다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께로 가는 것이 옳다. 이는 공식이요 법칙이다. 중세 초까지 기독교는 이 법칙을 지켰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명(召命)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심지어 지난 번 IMF 이후에는 목사 되면 직장에서 쫓겨 나지는 않고 굶어죽지는 않으니 어떤 사람들은 목사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 목사 되면 밥줄은 끊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목사가 되면 자기 소유를 모두 예수 앞에 내 놓아야 한다. 예수에게가 아니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지 않던가. `소유'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 소유를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또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상속하는 그런 수준의 목회자들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떠나지 못할까? 진실로 소유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죄에서, 또는 인간 육성(肉性)에서 자유로운 법인데 소유에서 떠나지 못한 자가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예수 앞에 나왔던 부자청년 이야기(막 10:17∼22)를 (다시)읽어보라.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으며 매우 용감한 청년기에 이르른 그 부자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예수)를 따르라는 말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께 등을 돌리는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볼 때마다 아쉽고 안타까운 모습이 아니던가.
 소유에서 자유롭게 된 레위가 예수께 달려나갔다. 예수는 그를 기뻐하시며 레위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받아주실 때도 그의 집으로 가셨는데(눅 19:5) 오늘은 마태의 집으로 가신다.
 이 기사도 마태(마 9:9∼13)와 누가(눅 5:27∼32)가 함께 기록하고 있다. 마태의 집에서 만찬이 이루어졌는데 시비가 벌어졌다. 마태의 친구들이 함께 초대를 받았을 터이니 세리들이 모여들었고 마태와 마가의 표현으로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 계신 마태의 집에 함께 초대 받은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누가는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표현의 묘를 살렸다. 누가의 글을 살피면 저가 문필력을 갖춘 작가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글은 때로는 섬세하고 또 어떤 때는 매우 기교에 능함을 발견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의 비난, 예수여 당신은 겨우 세리와 죄인들과 노는가. 당신의 수준이 그정도 뿐인가? 얄미울 정도로 가슴을 송곳으로 찔러 댄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각오하고 마태의 친구들과 동석한 것이다. 누가가 말한대로 마태는 그의 소유 모두를 버리고, 그의 모든 것을 예수께 위탁한 사람이다. 예수 역시 마태를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시며 그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이유를 말하신 것이다.
 죄인들 가운데, 그 한가운데 계시며 죄인들을 위로하시며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라. 예수의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바리새인들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마태는 그의 책 9:13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하시는데 이 말씀은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들려주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사랑행위, 저가 그의 아내 고멜을 어떻게 보호하는가의 내용은 호세아서의 주제요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 생활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무한 인내와 사랑의 파격이시다.
 예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그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위이신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 주시는 대목이다.
 내가 긍휼을 원한다. 제사가 아니라 긍휼과 인휼를 원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행하는 예배 행위가 긍휼과 사랑, 다시 말하면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동작으로 나타나야 함을 깨닫게 된다.
 뱀 눈으로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사람(신자)들의 약점이나 허물을 찾아내려고 허우적거리는 바리새인이 가엾다. 저들은 예수의 식탁에 앉아보지 못했다. 세리와 죄인들에게 열려있는 예수의 식탁, 의원의 몸은 죄인들 곁으로 늘 가고 있다는 예수의 말씀에 스스로를 건강한 의인을 자부하며 예수가 베푸는 긍휼과 용서의 잔치에서 비껴 지나치는 바리새인들의 처지가 매우 가엾다.
 세리와 죄인에게도 용서의 잔을 건네시는 예수 가까이에 있으면서 예수와 겨우 시비나 일삼는 바리새인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고 불쌍하다. 세인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 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보라. 마태와 마가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하신다.
 확실한 변화를 요구하신다.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는 그들이 예수에게서 얼마간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다. 예수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예수의 몸이다. 구체적인 실체다. 십자가에서 죽고 장례를 치뤘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니 지상의 터에서는 교회가 예수의 실체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거짓이고 착각이다. 예수는 마태의 주변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 이른바 새리와 죄인들을 많이 보셨을 것이다. 마태가 갈릴리 호숫가에 버티고 앉아서 고기잡이들의 세금을 매기며 사정없이 탈취하며,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부딪칠 때면 괴로와 했던 마태를 더욱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했을 것이다.
 병자들 곁에 계신 의사, 죄인들 곁에 서신 재판장 그리고 긍휼과 용서의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동작으로 레위와 그의 친구들 곁을 지키시는 예수를 보게 된다.
 예수의 안목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이겨낼 수 있으며, 가능하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위선자 바리새인들을 예수 앞으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제자가 필요할까? 제자가 아니면 친구, 친구가 아니면 다정한 이웃으로 함께 살기 위하여 세리와 죄인들 곁에 마치 병든 자 가까이 있는 의사처럼 버티고 서서 저들을 구원하자.
〈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