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죽음, 그리고 생명


 세례자의 제자들이 금식을 자주하면서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왜 당신네 집단은 금식을 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사실, 금식이 썩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금식은 식음을 폐하는 행위로써 그것이 결국은 죽음이기에 금식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의 리듬을 스스로 파기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같은 일이 그리 쉽겠는가. 또 금식을 자주 하는 행위도 진실로 바람직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져보면 좋겠다.
 예수께서 자칭 의인들이라 할 수 있는 비난자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 `금식문제'를 본격 거론하신다. 이 부분도 마태(9:14∼17), 마가(2:18∼22), 누가(5:33∼39) 모두 거의 비슷한 문맥으로 기록을 남겼다. 비중있는 말씀 임에 틀림없다. 어느 말씀인들 예수의 말씀에 비중이 없겠는가마는 `공관'에서 공통적인 관심사가 아니고,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는 기록이 있는데 마가나 누가의 글에 없다든지 누가에는 있는데 마태나 마가에 없고, 또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있는데 마태에는 기록이 없다든지 했을때는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본문 금식 부분은 마태 마가, 또 누가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일치를 보여주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왜, 당신들은 금식하지 않느냐? 세례자와 그의 집단은 일단 매우 경건한 그룹으로 바리새파가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새파의 경건 수준이 율법에 미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별도의 집단을 형성한 것이 에세네파요, 세례자가 에세네의 멤버였었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뢰의 대상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왜, 너희는 금식하지 않으냐는 추궁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 언제부턴가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고 있었으니 금식문제가 얼마간 예수 진영에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매우 통쾌한 답변을 하셨다. 이 말은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며 과연 예수가 종교를 하자고 세상에 오신 것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의 말씀 값이 되기도 한다.
 예수의 답변을 들어보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 법, 잔치집(은혜의 세계) 중심인 신랑을 확보한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기는 것이지 머리띠 졸라매고 죽고 싶다(금식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아우성을 치지 않는다.
 신랑과 함께 있는 자들은 함께 있는 시간까지는 즐겁고 만족한 것이다. 지금 예수와 그 따르는 자들의 무대는 `잔치집'이고 `천국'이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가 준비하신 `그 나라'가 이루어진 (성취된) 것이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찬송하면서 예수의 사람들은 기다리고 기다린다. 이미 오셔서 함께 하시고 또 오신다.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히브리어에는 시제가 없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완료이며 앞으로 이루어질 것은 미완료일 뿐이다. 신랑을 맞이한 제자들은 완료이며 완성이고 신랑을 잃어버린 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오시는 메시아이시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사유(思惟)체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오신다, 오셨다, 처음 오셨다, 아니 오신다라는 의미에 있어서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못난 신자들은 예수 재림에 대해 잔뜩, 그리고 별도의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또 요한계시록 공부를 한다고 야단을 부리고 있으나 요한계시록도 이미 이루어져가고 있지 않은가. 소아시아 7교회는 이미 심판이 끝났다. 터키에 가보라, 다 무너지고, 또 사실상 심판이 끝난 교회들,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다는 그곳에 가보라. 심판은 끝났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도 이미 그 문이 열려 해석되고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한다. 히브리어는 완료와 미완료 뿐, 이미 이루어진 자는 완성되고 기다리는 자는 기다려야 한다. 신랑과 함께 있는 자들이여! 천국이 너희 안에 있도다.
 `그러나'가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막 2:20, 마 9:5, 눅 5:35).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신다. 그러나,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 세상에 오신 후 단 한번도 그 신랑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은 금식할 필요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은 금식한다. 여기서 그 깊은 내면에 흐르는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신랑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자를 말씀하시면서 에세네와 바리사이들을 생각하셨을까? 그리고 세례자의 제자들도…?
 저들은 메시아(신랑)를 만나지 못한 자들이다. 세례자의 제자들이 예수 주변에서 했던 일들이 무엇인가, 저들은 마땅히 예수의 제자 모임에 편입되어야 했다. 생각해 보라. 세례자가 누군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종이 아닌가? 종이 격상되면 제자가 되고, 메시아가 신랑이면 신부 되어야 하고, 스승이면 제자가 되어야 하거늘 세례자의 제자들이면 더 말해 무엇하랴.
 신랑을 잃었느냐? 아예, 신랑을 만나지 못했거나 신랑이 있음도 알지 못했느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열심히 찾으라. 찾아야 한다.
 말씀은 더 정확한 증거를 하고 있다. 신랑이 누구이며 신부는 누구인가,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한 자들과 신랑이 와 있는데 나 죽는다! 나 죽는다! 하면서 머리 풀고 금식하는 자들은 누구냐?
 엄격하게 말하면 배반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신랑이 와 있는데 신랑을 맞이하지 않고 금식하고 앉아 있다는 것은 배신자요 불신앙자들이다.
 이를 예수께서 인증하신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막 2:21, 마<&26964>9:16, 눅 5:36)라 하시면서 세례자나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세계가 다름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는 생베 조각이고 바리사이와 세례자 집단은 낡은(옷) 조각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다. 신랑이 왔는데, 천년 또 천년을 기다려 아브라함의 그 소원 성취요 하나님의 계시 완성인 메시아가 예수 이름으로 왔는데 헌 누더기 걸치고 앉아서 금식이나 하고 있는 자들,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선생이나 그 아류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까.
 또 말씀 하신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다. 새 옷에 헌 천으로 기움질을 하지 말아야 하고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부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금식기도를 당신들도 해야되지 않느냐고 시비하고 덤볐다가 예수로부터 큰 망신을 당하는 바리새인들. 그들은 지금 쯤 예수가 누구인 줄 알고 있을까.
 유대 땅에 가보라.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서남 아시아 쪽을 바라보면 혹시 그쪽에서 오시지 않을까 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전에는 동방박사의 안내가 필요했으나 이제는 예수가 예수를 안내한다.
 이 땅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기다린다면서도 예수의 안내(가르침)를 받지 않고 있다. 신랑이 이웃에 와서 그 신부를 영접하였지만 마땅히 신부가 되든지 신랑집 하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자기는 신랑의 친구가 된다(요 3:29)고 했으니 머리 숙이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요 1:27) 했으면서도 예수 앞에 단 한 번도 무릎 꿇어 예(禮)를 표하지 못한 위인이다. 예수시대의 동방풍습은 스승 앞에서 일단은 무릎을 꿇는다(요 11:32). 그 다음에 스승이신 이가 너는 내 친구(요 15:13∼17)라 하시며 몸을 일으켜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 예수가 내 친구도 되는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금식시비 보따리를 풀고 보니 그 안에 심각한 내용들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 믿는다,는 행위가 대충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기본법칙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신랑과 함께 있는 자는 금식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없다. 신랑과 함께 하는 신부가 눈물 찔찔거리며 신랑의 밥상머리에 함께 하지 않고서야 어찌 신부가 되겠는가. 그러나, 단 하나 우리들의 주변에 신랑을 놓쳐버린 자들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도와서 `동반금식'은 할 수 있고 그 행위를 통해서 신랑의 값어치를 한 껏 더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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