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여, 나의 괴로움이여!

 예수가 하나님 자신이시며 진정 메시아일진데 구약의 안식일 임무는 끝났다. 결론으로 하는 말이다. 아직도 교회나, 안식일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안식일 재림교 또는 유대인들의 억척스러운 안식일 숭배(?)를 의식하면서 안식일이 왜 예수에게 매우 불편한 대상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사이로 지나 가셨다. 그 뒤를 따라 제자들이 밀밭에 들어섰다. 그들은 밀이삭을 훑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주위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날은 안식일이다. 예수 일행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뒤를 밟으며 감시를 하는 바리새인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얼시구, 저 놈들 보게, 저럴 수가…. 예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도무지 조심성이 없었다. 부러 해대는 행투도 같았다.
 바리새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놈들이 감히 안식일을 어찌 생각하는 것이야. 우리들의 모세가 명령한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인데 어찌 저같은 참람된 일을 저지르는 것인가.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길을 가로 막았을 것이다. 당신들이 누구요? 유대사람이 아닌가요? 바리새인들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말을 하면서 접근했을까, 아니면 당신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거야, 하면서 팔뚝을 걷어 붙였을까?
 예수가 제자들 앞을 가로 막고 나섰다.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 저렇게 무례하고 무모한 것인가, 당신이 선생인 줄 아는데 당신이 가르친 것인가. 안식일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차분히 말했다.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이다. 예수는 다윗의 예를 들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이 모를리 있는가. 그들은 예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말씀 선택이 절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윗이 아비아달 제사장 때에 그와 그의 부하들이 함께 행했던 일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대담한 파격이었다. 어찌 일개 장수가, 그가 군왕의 기상을 가졌다해서, 설사 군왕이라 해도 다윗의 행위는 용납받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한 때 사울왕이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감히 군왕이 해서는 안될 제사권 행사를 해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던 일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다윗의 예를 잘 알고 있는 터에 그들은 예수의 말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예수의 행위가 어찌 밀밭 훑는 안식일 파행 뿐이던가. 안식일 규약을 깨뜨리고 그날을 골라서(?) 병자를 고치고(마 12:14, 막 3:3∼6) 있으니 바리새인들이 헤롯왕과 공모하여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다(막 3:6).
 안식일에 밀밭에 뛰어들었던 일이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마 12:1∼8, 막 2:23∼28, 눅 6:1∼5)되었음을 공관복음 저자들의 예수 이해에 빈틈없는 일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안식일의 깊은 의미를 가르치신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본문(막 2:27∼28, 마 12:8, 눅 5:5)은 인자, 곧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말하고 있다. 이부분에서는 안식일의 주인, 인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씀을 주목하게 된다. 날과 달과 절기의 한계에서 자칫 벗어나 주객(主客)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다. 유대인들이 이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인간 우위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안식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안될 일이다.
 예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을 때의 그 말씀은 인자(仁子)는 사람의 아들, 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담'이 보통명사로 `사람'이라는 뜻과 마찬가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이 주인이다. 사람, 완전한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사 저들 `믿는 자' 모두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안식일에 밀밭을 헤집고 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행위, 또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하지만 예수 또한 단호하시다. 안식일 밀밭 헤집기에 이어,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치셨을 때(마 12:9∼ , 막 3:1∼, 눅 6:6∼) 바리새인들의 저항이 대단했지만 예수 또한 한 발도 뒤로 물러설 의향이 없었다. 마태 12장 11절을 보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교리실행의 행위가 그 본래의 뜻을 상실했음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성경해석을 할 때 자기의 일방적 경험이나 지식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나 구약의 율법을 함부로 취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존재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시비일 수 있다. 또 예수께서도 그가 누구신가를 더욱 명료하게 말씀하시기 위한 과정인 부분도 있어 보인다.
 마태 12장 5절 이하를 보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하신 뜻이 무엇인가?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함은 물론 예수 자신의 위상(위치)을 분명히 밝히고 계심을 해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오늘 본문은 당시의 바리새인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엄격한 교훈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도 바리새인들이 범하는 과오에 못지 않은 행동을 하여 사람의 가치에 대한 존엄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에서 참으로 핵심이 되는 부문은 주인공이 예수이면서 또한 `사람(人子)'임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신자들의 언행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하려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탓이다. 사람에게 함부로 행하는 사람들, 그들은 틀림없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함부로 대할 것이다. 그러도록 되어 있다.
 안식일, 이것은 예수 당시 유대교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만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거니와 그들의 동시대의 종파 중 하나인 에세네 파는 안식일날 대소변을 참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방광이 터져서 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들고 있다.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교훈이면 그 교훈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먼저 분별해야 한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매달리는가? 안식일을 주신 하님의 생각은 6일 동안 일을 했으니 하루는 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도 `안식일'의 교훈에 집중적인 힘을 실어 종파(교파)를 만들어 살고 있는 것도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나친 오만을 읽을 수 있으며, 또 다른 표현으로는 열등감이나 소외감의 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또 그들에 대해서 지나친 부담, 즉 이단 정죄라는 방식의 대처 또한 바람직한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바로 이러한 행위들이 인자(仁子)의 모습을 바로 발견하지 못한 소인배들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행하는 자세들이 무지와 열등감에서 파생한 소인배들의 행위였음이 틀림없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를 바르게 배울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겠다.
 맹목적인 또 하나의 편견으로 바리새인들을 비웃지 말고 내가 지금은 바리새인들을 뛰어넘어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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