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 공생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고, 가까운 시일 안에 예수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결심 했음을 알아차렸다. 죽일 방법만 남았을 것이다.
마가의 기록으로는, 예수는 제자들과 갈릴리로 ‘물러가시니’라 하였다. 바다 저 멀리로 물러가셨다.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메와 요단강 건너편, 그리고 두로와 시돈 등지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몰려 들었다.
유대와 예루살렘이면 유대인들의 대표이며, 이두메와 요단 건너는 물론 두로와 시돈까지 이방인들이다. 저들은 메시아의 내림을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날을 기다림은 구원의 갈망에서이다.
일단 예수의 행하신 큰 일을 본 저들은 예수의 주변으로 물려들어 성화였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안식일 손 마른 자를 고친 일로 바리새인들이 죽이겠다고 벼르자, 거기서 물러나시며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대목은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의 출현임을 은근히 밝히고 있다. 왕이시며 심판자이시기에 서두를 필요도 없으며 유대인의 심판과 이방인의 구원을 예고하시는 섭리를 헤아릴 수 있다.
갈릴리에 배 띄우고 말씀을 전하신 예수는 산으로 가셨다.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 중심으로 열두 제자를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셨다. 마태는 ‘부르사’(마 10:1)라 했고, 누가는 기도의 산에 올라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날이 밝자 제자들 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 )라 하였으나 마가는 ‘열 둘을 세우셨으니’(막 3:13∼ )라 하였다. 부르고, 택하시고, 세우신다는 말씀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지는 않겠으나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다, 는 공관복음이 열두 제자를 확정하는 그 의미에서 심사숙고하시는 주의 뜻을 헤아리게 된다.
그러나 열두 제자를 택하신 예수의 시간은 마태가 전체 28장 중 10장에서이며 마가는 16장 중 3장에서, 누가는 24장 중 6장에서이다. 복음서 지면 배정을 볼 때도 심사숙고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공생애 출발점과 열두 제자의 선택을 완료하는 시간차가 있어 보임을 주목하게 된다. 이는 제자선택이 공생애 출발점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예수께서 공생애 출발점에서 ‘메시아 자각’이 있었느냐는 신학자들에게 빌미를 주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메시아 자각은 이미 예수 자신이 확인한 바라 할지라도 제자를 열두명이나 선택하는 절차는 시간이 필요했음이라 해도 된다.
열두 제자는 예수의 공생애 활동 거의 모두를 바쳐서 공을 들인 성과이다. 열두 제자와 함께 3년을 사시면서 이루어내신 집중적인 비중이시다. 열둘을 세우시고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며, 그리고 내 보내사 전도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
전도하고 귀신을 추방하는 권세는 제자의 자격 제 1의 조건이요 덕목이다. 여기서 전도는 신·혼·신 전체의 감동을 통해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하는 말로 ‘예수 천당’이 아니라 복음(道)의 진실을 상대방 인격에 접목시키는 행위이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육화(肉化, Incarnation)와 같은 힘의 전도, 온 몸의 전도, 자기 삶으로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과연 예수 제자들이 지닌 파워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의 길로 내보내신 것과 같은 명령을 받았을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전도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또한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는 어떤가? 귀신의 영역을 생각해 보라. 귀신을 말하면 영적 상태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게 아니다. 귀신은 영적 상태이기도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사상, 곧 비진리의 대상 모두의 행위가 귀신의 술수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귀신 쫓는 일은 사실상 동일한 행위이며,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하신 일을 보라. 전도는 어떻게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세는 또 어떻게 행사하려는가? 예수의 전도는 그가 공생애 기간에 행한 삶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공생애 출발과 함께 제자 그룹 발표를 하지 않았다. 정권이 출발하려면 예비조각, 또는 취임식과 동시에 각료 발표를 하는 것처럼 예수의 공생애도 출발과 함께 열두 제자를 발표할 수도 있을 법 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이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한 사람 또는 한 사람 개별 설득, 또는 선택의 신중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 딸을 낳듯이 하나씩, 또 하나씩을 낳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는 제자란 낳는 것과 같으며,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전도의 의무는 전도자(제자)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행사된다.
오늘의 교회들은 이 점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옛날 부모들이 자식을 낳을 때, 다 저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식으로 무조건 많이 낳았던 것처럼 신자를 무한 생산해 대거나 남의 교회 신자를 훔쳐오는 등 쟁탈전까지 벌이는 요즘의 일부 교회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된 행동은 삼가야 한다.
언제든지 그러해야 하지만 신자는 낳는 것이다. 교회는 가톨릭 제도를 한 번 눈여겨 보라. 저들은 영세자 한 사람이 나올 때면 대부, 또는 대모를 반드시 모신다. 대모는 새로 출발하는 영세 신자가 일정한 수준이 될 때까지, 아니 세상 사는 날 동안 내내 부모를 모시듯이 하는 이들도 있음을 본다.
다시 말하거니와 신자는 어머니의 태(womb)에서 태어나는 것과 똑같은 의미와 신비한 절차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물과 성령으로라 하심과도 같다. 물은 예수의 육신과 같고 또 말씀과 같다. 영은 성령 하나님을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태궁을 통해서 나오듯, 그리고 나와서 수십년 연단과 훈련을 거쳐서 한 사람의 하늘 인격이 되며 ‘제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긴 날의 정성을 통해서 신자가 나오고, 그가 제자의 격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가문에서 비로소 전도가 시작되는 것인데 이는 제자의 가문을 ‘교회’로 봄이 또 좋을 듯 하다.
신자의 전도, 제자의 전도는 교회가 책임지는 수준을 말한다. 신자는 교회에 종속하며 또 일치한다. 교회는 신자요, 신자들의 복합체이다. 그러나 이를 망각한 오늘의 일부 신자들이 교회를 도둑의 소굴(요 2:16)로 만들어 버리기는 했으나 곧 가까운 시일 안에 주가 오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후려 치시며 크게 진노하실 것이다.
바로 배우자. 교회는 신자다. 교회는 제자다. 교회는 아들이요 예수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들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오늘의 기독교가 주변으로부터 경멸을 받고, 또 빛을 드러내지 못하여 세상을 슬프게 한 행위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또 저들을 기르실 때 단 한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신 그런 자세로 신자를 양육하지 못한 결과이다.
열 두 제자의 이름을 불러보자. 시몬 베드로,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메 그리고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데오, 가나안인 시몬, 그리고 가룟 유다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룟 유다가 예수 제자의 명단에 있음을 본다. 이 사람은 예수를 판 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이 있었다.
택하여 부르신 제자들을 세우사 예수의 제자로 삼으셨으며, 3년 동안 저들과 동행 동숙하시며 요즘 말로 집중훈련을 시키셨으며 삶의 모범을 통하여 감동을 주신 날들이 얼마였겠는가.
그러나 유다는 떠났다. 떠나는 사람, 또 그가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과 로마의 군사들에게 예수를 넘겨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잡으러 오는 자들 앞을 가로 막고 `누구를 찾느냐? (Who is it you want? 요 18:4∼ )'고 물으셨으며, 예수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내로라(I am he)' 하셨음을 볼 때 유다의 역할은 별무소용이었다. 그 역시 예수가 잡히시는 것을 본 후에 자기 행동을 후회하였다.
유다는 향후 기독교의 품격과 행동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미완의 기독교 앞날을 재촉하는 마음으로….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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