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립이 1384년에 세상을 떠났고, 죤 후스가 1415년 7월 6일 정죄를 받고, 당당한 자세로 화형을 당했다. 이 두 인물은 중세기 역사의 전환점을 몰고 왔다. 이미 중세 로마교회는 십자군 전쟁(1097∼1291 AD) 와중에 그 위상이 추락되었으며, 1천년의 기둥으로 로마의 하늘을 지켜주었던 로마(가톨릭)교회는 도덕적으로나 구라파 제국가(민족)들을 통치하기에는 너무나 노쇠하였다. 십자군 전쟁을 말하면 필연적으로 이슬람이 동시 등장을 하는데 AD 610년 이슬람의 주인인 모하멧이 종교선언을 하면서 아라비아는 물론 중동 아시아의 변방에서 떠돌이 처럼 살았던 셈족의 또 한 축 이삭의 형인 이스마엘 자손들이 그의 이름으로 모여 들었다. 기독교는 이슬람의 모하멧이 등장하면서 오래되지 않아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AD 637년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그리고 안디옥 마저 사실상 이슬람의 영역이 되어갔다. 그 상황을 말하면 너무나 허망하다. 예를 들면 모하멧이 창업한지 27년 만에 그것도 그가 (AD) 634년에 세상을 떠난 뒤, 모하멧이 살아서 겨우 24년의 지도력을 발휘했는데 막강한 로마의 절반이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나 허술했으면 그랬을까. 당시 기독교문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5개의 세계 교구를 가졌었는데 그것들이 그만 60%가 이슬람의 영지가 되고 말았다. 오늘의 기독교가 한 번 쯤 정직한 마음으로 되돌아 보아야 할 역사의 비극 시대였다. AD 637년 세계 기독교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로마, 그리고 기독교는 무슨 말을 할까? 그때의 역사 상황을 변명하고 싶을까?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다음가는 도시였고, 안디옥도 4대 도시권에 속하였다. 알렉산드리아가 반기독교 세력의 영토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기독교의 이론과 변증의 터전도 잃어버린 것으로서 사실상 절반의 상실이 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이 차례로 무너지고, 로마 교구도 일차 점령을 당해 혼쭐이 났던 일이 있으며, AD 1054년에는 로마 교황청은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와의 관계도 청산, 자기들 말대로는 사탄의 세력으로 몰아 버리고 홀로 기독교를 지키겠다고 큰소리 쳤다. 바로 이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정치적 술수가 십자군 전쟁의 숨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증거가 있다. 제 1차 십자군 출병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아 라틴왕국을 세운 로마 교황권은 제4차 십자군 출병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거기에 라틴국가를 세우는 등 매우 오만한 짓을 감행했다. 무섭지 않은가. 예루살렘은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되찾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기독교에게 제1의 은공을 내린 콘스탄틴 황제의 도시가 아닌가. 또한 자기들과 몇가지 교리적 충돌은 있지만 같은 기독교의 입장과 신분을 가졌는데 그들 콘스탄티노풀을 치는 군사들이 십자군일 수 있다는 것인가. 죤 후스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배경에 너무 많이 시간을 사용하였다. 죤 후스는 위클립의 뒤를 이은 인물이다. 보헤미아의 태생인 후스는 후시네츠(Husinecz)의 농민태생으로 1373년 생이다. 앞서 기록한 대로 화형장의 재로 사라져간 죤 후스, 그 뿐 아니라 화형은 그 시대의 양심인들에게는 기꺼이 받아들이는 명예로움이었다. 후스의 보헤미아 14세기는 놀라운 정치적 발전기였다. 당시 신성로마 황제 찰스 IV세는 보헤미아 왕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교회가 지나치게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풍습에 깊이 젖어 있었다. 토지를 많이 가졌다는 것은 당시의 규범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농노의 신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주들보다 더 힘이 있는 성직자들이 누리는 부와 사치는 사회를 더욱 어둡게 하였다.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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