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체코)의 후스는 영국의 위클립과 어떤 관계일까? 위클립은 개혁의 횃불, 또는 샛별이라 했고, 복음 박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60여 세를 살면서 학문적 기초가 튼튼한 지도자였다. 국왕의 신학고문, 즉 `궁정 목사'로서의 지위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교황권에 대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위클립 시절의 교황권은 소위 아비뇽(교황권) 시대라 하여 교황권이 분열하여 프랑스 영토인 아비뇽에 셋방을 차려야 했으니 국왕의 눈치나 보는 수준이었다. 위클립은 이 틈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위클립의 저술활동, 특히 성경번역과 보급(반포)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니 그는 구라파 전역으로 그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후스가 등장하는 보헤미아는 교회가 귀족노릇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그들은 더 많이 타락했을 것이다. 도덕적 방심이나 방종은 대개 넉넉한 살림에서 나오기가 쉽다. 보헤미아의 지도자 후스는 위클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떤 경우 그도 위클립을 그대로 모방했을 만큼 기울어 있었다. 더 쉽게 말하면 위클립의 제자였던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위클립의 후계자가 후스라 할 수 있다. 그의 개혁은 승계해가는 인물은 영국에서 나오지 않았고 보헤미아에서 나왔다 해야 한다. 당시 보헤미아는 영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위클립의 옥스포드와 후스가 교수로 있는 보헤미아 프라그(프라하) 대학은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영국왕 리차드 2세와 보헤미아 공주 안나와의 결혼(1383년)을 했으니 그들 두 나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위클립의 저서는 영국의 사돈 나라인 보헤미아에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또 보헤미아 학생들이 옥스포드 유학을 많이 했으므로 위클립의 개혁의 횃불이 보헤미아도 옮겨 붙기가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 무렵 후스가 등장한다. 1369년 생이니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스는 영국 유학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매우 총명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위클립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행복이다. 그러나 당시 보헤미아 자체로도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한 중간에선 구라파는 어느 곳이든지 교황권으로 부터 자유로와 지고 싶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후스는 위클립과 같이 교회는 예정된 자들의 모임이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법은 교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며, 신자의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청빈한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스는 `성찬'에 대한 견해를 `화체설'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클립보다 보수적인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위클립의 복제판'이라 할 만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보다 감동적이고, 선동적(?)이며, 열정으로 넘쳤다고 한다. 후스는 1401년 안수를 받고, 이듬해인 1402년부터 프라그 대학 신학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서 프라그의 한 교회에서 설교자로 봉사하면서 생활을 했다. 한때는 로마 교회로부터 지지도 받았으나 그가 `성직'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서자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프라그의 적수들은 후스를 로마 교황청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가 보헤미아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후스는 파리, 옥스포드 다음 가는 프라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1409년) 그의 명성은 더더욱 치솟았다. 그가 개혁자 그룹의 투사이며, 지도자가 되는 대는 그가 보헤미아의 말로 대중설교를 하면서 국민적 인기의 합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후스의 친구들을 `위클립주의자'라 했으나 차츰 후스가 존경을 받게 되자 `후스주의자'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교황권에 의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갑자기 커져버린 후스를 경계하는 수준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단계가 되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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