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인가, 아니면 주황색 혹은 파란색도 될 수 있는가

상생의 시대를 향하여
1. 다양성 시대, 갈등하는 사회
2. 대화를 통한 가능성
3. `다름'을 인정한 후
 보통 우리 사람들은 `흰색의 반대는 무슨 색인가'를 생각하면 한결같이 `검은 색'이라는 대답을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고정된 생각을 다시 한번 두드려 보면 흰색의 반대는 붉은 색도 될 수 있고,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논리 속에는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식구조, 나와 같이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흑백논리'가 팽배하다.
 이렇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할 때 서로에 대한 갈등은 미움을 낳기도 하고, 무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그것이 집단으로 작용하면 정치적 혹은 종교적 싸움, 전쟁으로 이어지는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9·11 세계무역센터와 같은 테러가 일어났고, 이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전서 〈문명의 충돌〉에서 기독교 문명의 오만함과 이슬람 문명의 편협함에서 오는 충돌을 예고하기도 했다.
우리의 사회는 노사간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FTA 협상, 부안 핵 폐기장 문제 등의 마찰을 수차례 반복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시대를 활짝 열였지만 화염병은 다시 등장했던 지난해였다. 북한의 핵 위협, 또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정책 등의 이유로 한반도가 심한 상황에 처하자 반공주의 틀 속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미국에 의존하는 것을 지양하고 자주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해 나가려는 이들 사이에 한국사회는 2003년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런가 하면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에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게 되고, 결국에는 분쟁과 분열과 마찰로 치닫는 일이 위험 수위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사회의 흐름 속에서 지난 한 해 기독교는 평화의 당사자가 아닌, 갈등의 주인공으로 표출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북한의 핵 문제와 미국의 9·11 테러로 인한 이라크 공격 등과 맞물려 우리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고심했다. 그러나 시청 앞에서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을 두둔하고, 찬양한 일부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했다. 미국의 협조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주권국가로서 해야 할 목소리를 정확하게 내지 못하고 눈치보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 내에서만의 갈등은 아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크나큰 갈등의 폭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면서 사회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 하지 못했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청종하지 못했다. 정치적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간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간다는 기독교로서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한 채 이런 사안에 대해 감정적인 행동을 보였음에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것 뿐인가. 교회 내에서 목사와 장로와의 분쟁으로 사회에 문제시 된 것이 한 두 사건이 아니었다. 다수와 소수의 의견을 도출해 결정해야 할 교회 내에서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야기하다가 어떤 목회자는 구속까지 되고, 어떤 교회는 갈라지고, 신자들은 상처를 입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교회 내의 갈등으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추구해야 하는 곳에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감신대 종교사회학 이원규 교수는 〈기독교의 위기와 희망〉이라는 저서에서 종교적 분쟁과 대립, 이념적 갈등과 긴장을 야기하는 주요인은 특수주의, 자기우월주의, 민족주의 이념 등에 근거한 종교적 배타성이며, 이것은 기독교-이슬람교 관계에 있어서 특히 더하다고 말한다. 그 배경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수주의로 무장된 배타적 이슬람 원리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종교갈등을 심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이념으로 작용,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종교 이념의 극복이야말로 종교평화, 인류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교수는 또 대화나 평화가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세계주의와 공동체성이 결합된 종교이념의 모델을 수용하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 교리와 신학을 세계주의와 공동체성의 틀 안에서 정립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한다. 야웨에 대한, 알라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세계주의와 공동체성이 결합된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신학자들, 종교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제시했다.
인류학자들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날 `상극(相克)의 시대'에는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으로 통했고, 그래서 끝없이 싸우고 짓밟고 투쟁했다고 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통했고 이런 가운데 획일주의, 형식주의, 군사문화, 싹쓸이 문화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 한국교회 내에서도 그런 모습은 어김없이 반영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종교라는 이념 속에서 맹신하는 것을 강요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 있을 수 있는 문제 제기-왜 그럴까?, 꼭 그래야 하나, 지금 이대로는 좋은가, 다른 사람들은 왜 저렇게 생각하나-를 하면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닌 눈으로 봐 온 것이 사실이다.
이의용 소장(교회문화연구소)은 자신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개인에게서 진정한 회심을 기대할 수가 없고, 구성원들이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조직에서 개선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 교회는 교인들이 문제의식을 갖는 것을 `비판'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의식은 비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열렬한 문제의식으로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을 떼어내자고 강조한다.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는 바로 `상생(相生)의 시대'라고 한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Win-Win의 시대, 함께 잘 사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다름'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권에서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아니 세계 모든 사람을 통털어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현실을 직시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 싶다. 다만 `다른 것'과 `틀린 것'에 대한 차이를 알고 연습과 훈련, 그리고 마음가짐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듯 싶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나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맞다, 틀리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서로의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면 오해나 편견은 줄게 되고 갈등도 줄고, 미움도 원망도 줄어들 것이 분명할 것이다.
강원용 목사(평화포럼 회장)가 최근 한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은 오늘날 우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종교를 구분하는 기준에 있어서 `열린 종교'냐, `닫힌 종교'냐 하는 것일 것이고,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열린 종교'일 것이다.”
양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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