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집어든 책 속의 자료사진에 안경이 수북히 쌓여 있는 광경, 그 사진 속 안경의 주인이 금방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것이었음을 알고 그들의 고통이 가슴 깊이 전해져 왔던 기억이 난다. 쌓인 시체를 보며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슬픔이었다. 이처럼 과거의 상흔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후대에 전하는 작업은 역사의 단편을 이해하는 것 외에도 당시와 현재를 사는 이들 사이에 시공을 넘어 `너와 나'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유태계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72) 역시 이같은 작업을 오랫동안 해온 인물이다. 그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에 15살의 나이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비르케나우에 수용, 1년여 동안 강제 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후벤발트로 이동, 1945년에 해방을 맞아 풀려났다. 1948년부터 부다페스트의 `빌라고사그'지 기자로 일하다가 신문사가 헝가리 공산당 기관지를 표방하자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니체, 호프만스탈, 프로이드 등의 작품도 생계를 위해 번역했다. “소설을 구상할 때마다 항상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가 쓴 작품은 대부분 전쟁 당시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적인 생활의 경험이 소재가 된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역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소르슈탈란사그(Sorstalansa g;Fateless)'이다. `비운'이란 뜻인 이 소설은 15살의 소년이 나치에게 체포돼 수용소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겪게 되는 현실들에 적응하며 살아남은 이야기를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케르테스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스웨덴의 한림원은 “역사의 야만적인 잔혹함 때문에 부숴지기 쉬운 인간존재를 지탱시켜 주는 근원적 힘을 잘 표현해 냈다”고 수상 이유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 “케르테스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정상적인 서유럽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의 실체 속에서 발생한 인간 타락에 관한 궁극의 진실 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나치의 잔악성을 단편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용소 생활에 너무도 당연한 듯 적응해 가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사는 것이야말로 순응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이같은 능력은 모든 인간들로부터 발현됨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음을 한림원은 높이 평가했다. 역시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15살에 지나지 않은 소년은 당시 나치의 눈에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하찮은 벌레 정도의 가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 그는 세계 문학계가 인정하는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이었으며, 다시 한번 `인간 존엄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작품은 이 외에도 `좌절', `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등 당시의 상황을 그린 책들이 발간돼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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