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이 상처투성이로 끝나고 사실상 패배하였으니 교황권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는 징기스칸의 세력이 1208년 북 중국을 정복하면서 아시아 북부를 건너 1238년부터 3년간 오늘의 서유럽과 러시아 남부 대부분을 정복하고 1258년에는 팔레스타인 경계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북중국, 중앙 아시아를 거쳐서 동유럽을 단숨에 짓밟은 강자가 몰려올 때 서유럽은 벌벌 떨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 세력의 위축으로 나타난다. 중앙 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 당나라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네스토리우스의 '경교'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은 1291년 사실상 기독교의 패배로 끝나면서 로마 가톨릭은 크게 위축되었다. 1054년 비잔틴의 동로마제국교회와 결별하고, 그 아픔을 극복하고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할 수 있는 로마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와의 갈등에 빠져들었다. 교황청은 불행했다. 보니페어스 교황의 뛰어난 후계자 베네딕트 Ⅳ세가 죽은 후 추기경단은 프랑스인 베르트랑 드 구프(Bertrand de Gouth)를 클레멘트 Ⅴ세로 선출하였다. 성격이 약하고 도덕적인 허물이 있는 사람인지라 프랑스 왕 필립Ⅳ세의 영향 밑에 있었다. 클레멘트 Ⅴ세는 필립Ⅳ세의 꼭두각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필립의 무죄를 선언하고, 교황권의 프랑스 지배를 과시하였다. 1309년 프랑스 영토나 다를 바 없는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다. 이를 소위 아비뇽 교황권 시대라 하는데 마치 예루살렘이 신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멸망, 성전이 파괴된 후 바벨론으로 왕과 귀인들이 끌려가 포로기 70여 년을 살았던 때와 비슷한 형국이었다. 이제 교황청은 프랑스의 한 기구처럼 보여졌고 또 이 기간 중 대부분 프랑스와 전쟁 중에 있던 영국 또는 교황청의 계속적인 간섭에 시달리던 독일 같은 나라에서의 교황의 요구는 무척 힘들었다. 아비뇽 교황청 시절 유능한 교황 죤 12세는 교황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비뇽 교황청, 또 이탈리아의 교황청은 정리되지 않은 시대의 비극이었다. 아비뇽에서 세금을 모두 거두어 갔으니 이탈리아 교황령은 수입이 대부분 끊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사치와 낭비버릇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늘 생각하기를 언제쯤 교황권을 되찾아 오는가를 기다리기만 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가거나 로마로 되돌아오던 간에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시대, 곧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고 있는데 교황좌가 어디로 옮겨간다 해서 옛시절이 돌아오는가. 이미 우리는 영국의 위클립을 공부했고, 보헤미아의 후스가 교황권을 향하여 비수를 들어댔음을 알고 있다. 이에 로마교회의 반응은 어떤가. 시대가 바뀌는 의미를 저들이라고 모르겠는가. 앞서 교황권이 아비뇽으로 옮겨가는 현실을 바벨론 포로기의 예루살렘(성전) 처지와 비교했음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부셔지고 왕과 귀인들,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성전시대의 종말'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아비뇽 교황권 시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부른다. 바벨로 포로 귀환의 예루살렘은 페르샤, 로마 지배시대와 마카비가의 몸부림을 거쳐서 예수의 등장을 부르듯이 아비뇽 교황청 시대 70여 년은 종교개혁기를 부르는 시대의 전환점이 된다. 아비뇽 시대는 새 시대의 출현을 강력하게 예고한다. 로마교회 자체에서도 시대의 눈을 뜨기 시작한다.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의 개혁, 기독교가 역사의 무대에서 `종교이상'이 되지 못하고 여러 종교들 중 하나로서 결국은 실패할 종교로 자족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개혁시대를 부를 수 있는지는 앞으로 나타날 움직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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