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례가 일을 하면서 마당을 한바퀴 죽 둘러보다가 마루를 힐끗 쳐다보니 지산동 성님이 마을사람 누구인지는 몰라도 막걸리 상을 앞에 두고서 담배를 곰방대에 피워 물고 있었다.  문상객을 대접하는 듯 했다. 문상객을 대접하는 장소는 마당에서부터 뒷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차일을 친 마당에 가마니가 깔리고 교잣상을 평상으로 이미 문상객들은 이곳 저곳에서 삼사오오 짝을 이루며 술잔을 기울리고 있었다.  문상객들이 밀려드니 마루 귀퉁이까지 술상이 놓여진 것이다.  “성님! 이야그 들었소?” 셋째가 옆에서 화제를 돌리면서 물었다.  “무신 이야그?” “아부지가 어무니 상치르고 나면 열매어무니를 안방에 데려올 생각인가벼요?”  “그것이 무신 이야기냐?” “어젯밤 최서방이 그러는디요. 아부지가 술김에 그려셨는지 몰라도 초상치루고 나면 열매어무니를 안방에 데려오겠다 했다고 그럽디다!” “…” 열매어무니는 아버지 남도령이 본 네번째 씨받이 여자였다.  “동네 사람들이 욕하제잉! 어무니죽고 나자마자, 그러면 욕 듣것다!” “아부지는 암시랑토 않을 것이요!” “우리 가정이 대이을 아들하나 없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네 증말!” “그롬 어쩔꺼시요! 아들이 없는디!” 영례의 한탄에 셋째는 이렇게 말하고는 “성님! 나는 부엌에 가서 술상 보는 데 일을 도울라요”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번 홍분님의 장례식을 통하여 셋째동생 제부 최용기씨가 남씨 집안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사위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최씨라는 성씨의 독특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매사에 꼼꼼했으며, 처리하는 일 하나 하나가 매끄러웠고 공평했다. 그리고 남도령은 셋째사위의 말이라 하면 무조건적이었다.  24. 개간 소문으로만 들어서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하지 못하던 대다수 진제마을 사람들은 동네 상젯문 앞 게시판과 선샌네 담벼락에 혁명 공약이 나붙자, 비로소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영례도 어머니상을 치룬 뒤, 진월리로 돌아와서 그 혁명공약 6조를 골목에 나붙은 선샌네 담벼락에서 읽어 보았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벽보를 볼려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영례에게는 모두 유식한 말들이라 그 벽보에 씌여진 말이 거의 이해가 안되었다. 다만, `제4조의 …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 말 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   혁명공약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세상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러가지 소문을 이야기해 줄 때에는 귀동냥이 즐겁기까지 했다. 떠도는 이야기는 항상 두목 박정희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영례는 혁명이니, 반란이니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양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희락이와 화평이를 데리고 뒷산에 밭을 개간하는 일을 시작했다. 뒷 산의 산주는 광주시내에 살고 있었지만, 산지기는 돌모랭이에 살고 있었다.  그 산지기는 다행히도 영례남편을 잘 알고 있었고, 영례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던지  “홍샌네 밭 윗쪽으로 개간해 보시요잉! 그리고 솔나무를 많이 비어내서는 안되요잉!”하고는 쾌히 승락을 했다. 그 산지기는 영례뿐 아니라, 동네 여러 가난한 사람들에게 산을 개간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소출이 나오면 1년에 한차례씩 돈을 얼마씩 받아갔다. 돈이 없는 집에서는 깨나, 보리, 고구마 등도 받아갔다.  그러나 개간이라는게 쉽지 않았다. 영례는 매일 아침 낫과 괭이와 호미 등을 들고 뒷 산으로 올라갔다. 야산을 밭으로 개간하는 일은 먼저 나무들을 베어내고, 곡괭이로 나무뿌리를 파헤쳐 걷어내고, 땅에 박힌 돌을 빼어 내고, 자갈 등을 골라내는 작업순으로 이어 지는데 요새 몇주일 동안 뒷산에서 화전민들처럼 살다시피 했어도 여전히 나무뿌리를 곡괭이로 뽑아내는 일도 다 끝내지 못했다.  희락이와 화평이가 학교를 갔다와서 오후시간으로 도와 줄 때는 마음속에서 새 힘이 솟아 오르고 한결 일들이 쉬웠다.  희락이는 가끔 쉬면서 일하는데 화평이는 달랐다. 마치 불도져처럼 오후 내내 한번도 허리펴고 쉬지 않았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했는지, 그 많은 일들이 부담되었던지 한이틀씩 어디론가 놀러 가버리곤 했다.  그러나 희락이는 꾸준했다. 빠진 날이 거의 없었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도 이렇게 서로 성품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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