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계지도력은 급속히 저하되기 시작했고, 세계초강대국의 체면이 월맹군에 의해 여지없이 구겨졌다. 미국의 파병요구로 한국군을 파병했던 한국도 큰 손상을 입었다.  미국 달러 미국의 세계지도력은 급속히 저하되기 시작했고, 세계초강대국의 체면이 월맹군에 의해 여지없이 구겨졌다. 미국의 파병요구로 한국군을 파병했던 한국도 큰 손상을 입었다. 미국 달러는 벌어들였지만, 젊은이들의 피값은 달러로는 계산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월남이 패망한 것은 월맹군의 전방위 게릴라전법 때문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물론 미군들도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려야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휴유증은 각방면에서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28일에는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최초의 동기가 되었다.  6월 1일에는 새가정의례준칙이 선포되었다. 청첩장 및 부고장도 돌리지 못하게 하고, 결혼식도 간소하게 치루도록 정부가 국민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한여름인데도 유신헌법발효로 조국의 산하가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요계에서는 남진과 나훈아의 세기적 가수대결로 크게 뜨거웠다. 두 가수들은 리싸이틀을 경쟁적으로 서로 가졌다. 두가수의 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패걸이로 나눠졌다. 가수들에 의해서도 지역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7월 3일에는 포항제철이 준공되었다. 박 대통령의 야심에 찬 공업화 의지가 포항제철이라는 괴물로 나타난 것이다. 영례는 1973년 10월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의지해 왔던 희락이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데모는 김대중 씨 납치사건이 있은 8월 8일 이후로 더욱 거세졌다. 김대중씨는 그동안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호텔에서 납치되어 실종되었다. 야당인사들은 정적이었던 박대통령과 연관시켜 납치사건을 생각했다.  10월 들어서 서울대를 비롯한 유신반대데모가 전국대학으로 번지고 있었다. 희락이는 대학의 학생간부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데모대의 주도적 역활을 하게 되었다. 아니다. 대학의 학생간부였기때문이 아니라, 희락이의 핏속에는 역사적으로 불의에 저항해왔던 광산 김씨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례에게 희락이가 유치장에 들어갔다고 처음 알려준 것은 큰집 조카 봉주였다. 봉주는 동광주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봉주는 영례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숙모! 희락이가 데모하는디 앞장서 가지고라우! 시방 경찰서에 잡혀있당께라우! 근디 무신 낙을 누린다고 살림도 어려운데 대학교 보내시오? 요새 학생들은 비싼 학비 내고 공부는 안 허고 데모만 허는디!” 봉주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조카! 그 경찰서가 어디라 했는가?” “동광주경찰서랑께라우! 내가 근무하는 경찰서랑께라우!” “그먼 안심이네! 자네가 있으니 좀 도와주소! 앞으로 어떻게 되것는가?” “모르것소! 위에서 결정허니께! 그란디 요새 데모 하믄 다 잡혀가서 콩밥 묵어라우!” 봉주는 이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영례는 그 길로 시내버스를 타고 물어 물어서 동광주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헛탕이었다. 지금은 조사중이라서 면회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데모한게 큰 죄다요?” 영례는 이런 미련한 질문을 경찰에게 해댔다. “큰 죄지라우 시방은. 요새 데모 하믄 집안 삼대가 망한다요!” 경찰은 이렇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농담만은 아닌 말인 것 같았다. 그날 영례는 시내버스를 탈 생각도 못하고 그냥 남광주역으로 해서 방림동을 지나 철로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방림동에서부터 철길을 따라 월전까지 오는 길은 영례의 한 많은 인생길 같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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