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위클립이나 후스의 시대와 함께 교황권 내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각 민족들이 교황의 명령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 또 하나 교황권이 아비뇽으로 이거하면서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조직력의 와해를 들 수 있다. 무너진 것이다. 아비뇽에 교황파 하나, 게르만의 신성 로마에서 또 하나, 이태리에서 또 하나, 이런 식으로 교황권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니 저들의 앞날이 예측 불허였다. 그래도 파리 대학의 교수들이 일어났다. 파리의 교회법학자 겔론하우젠의 콘라드를 비롯하여, 파리대학의 독일인 학자 랑겐슈타인의 하인리히는 더 이상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나섰다. 총회가 분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볼로냐의 교회법 학자들, 심지어 추기경들 사이에서도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로마, 나폴리 그리고 독일의 상당수의 지역이 그레고리<&24904>세를, 스페인, 포르투칼, 소코틀란드는 베니딕트Ⅷ세를, 영국, 프랑스, 독일의 특정지역에서는 알렉산더Ⅴ세를 지지하고 있다. 교황이 하나, 둘, 셋으로 늘어나고 있다. 교회총회는 이미 석양을 맞이한 교황권을 무시하고 총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했다. 콘스탄스 선언이다. 총회는 민족들 사이에서 여론이 분분하여 쉽게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미 말했다. 15세기 초의 교회는 타락의 질곡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중세교회의 약점은 성경을 가볍게 여기고 또 믿지 않는 행위에 있었다. 또 하나 서방, 곧 라틴교회는 동방교회와 1054년 결별한 관계이고, 이에 3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 왕국을 세우는 등의 망령된 일을 행사했으나 1430년대의 시간에는 동서교회의 시비가 아니라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틴의 도시 사방 16Km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중에 넣어버린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터키와의 전쟁을 위해서 서방세계의 자원을 받아야 하는 동로마는 무엇이든지 서로마 교회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했다. 서방의 원조가 시원치 않았다. 서방 또한 비잔틴을 도와줄만큼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 서방의 전도를 갈망하는 황제 존 Ⅷ세는 콘스탄티노플 대감독 죠셉 Ⅱ세와 유능한 나케야 대주교 베사리원과 더불어 헬라 교회와 라틴교회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1437년 교황은 헬라교회와 만나기 위하여 총회본부를 페라라로 옮긴다고 선포했다. 사실상 교황권의 요구가 승세를 좁히는 듯 했다. 1439년 플로렌스로 옮긴 페라라 총회는 헬라인과 라틴인들 사이의 오랜 토론을 했으나, 동방 대담들의 권위를 유지하며 교황권에 복속하겠다는 애매한 이론을 폈다. 그러나 헬라교회는 교황의 최상권을 받아들였다. 헬라인 고유의 예배형식과 사제들의 결혼, 삼위일체 신조의 각기 특성을 확인, 그러나 동방교회는 라틴을 따르기로 하였다. 에베소의 대주교 미가는 이 협정을 거부했으나 황제와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방의 수도사들, 단성론자들, 네스토리우스의 계파들이 과연 서방교회에서 어떤 생존법을 발휘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방교회로부터 도움이 변변치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은 분개하고 흥분했다. 용납할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교황에게 무릎 꿇느니 차라리 오스만의 터반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1439년의 동서교회 통합논의는 물거품이 되었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틴Ⅱ세는 그래도 붙잡을 수 있는 곳은 교황청 뿐이었다. 아나톨리아 대륙, 또 흑해 저 멀리까지를 바라볼 수 있는 삼중성벽으로 콘스틴 황제가 올랐다. 오스만의 16만여 명의 군대가 벌떼처럼 웅성거리며 대포를 가끔씩 쏘아대고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제국은 이렇게 무너지는가? 동·서로마는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없는가. 오스만 터키의 메흐멧 2세를 맞이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싸우자. 싸우다가 죽자. 조효근/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