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짐씨! 날 따라오시오! 여기 있다가는 사고 나것소!” 이렇게 말하면서 영례의 손을 붙잡고는 “어이! 쫌 비켜주소! 학상들!”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옆에 있던 학생들은 “애국시민 여러분! 우리를 쫌 도와주시오! 저 놈들은 우리 나라 군인들도 아니여라우! 쥐약 묵었써라우!”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중년 남성과 영례의 손을 내밀어 잡고는  “어저께 5·17계엄확대로 민주화 인사들이 다 예비검속 되었당께라우! 김대중 씨도 구속 되었당께라우!”  라고 하면서 두 사람을 억지로 자기들 대열에 몰아 넣었다. “난 내 아들을 찾으러 왔단말요! 조선대학생이여라우! 난 김대중 씨가 누군지 날 몰라라우!” 그 학생은 김대중 씨 이야기를 하고, 영례는 희락이 이야기를 했다. 동상이몽이다. 영례는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광주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지난 18년 동안 유신독재 기간에 지역불균형에 따른 정치적 소외감과 경제적 침탈 등으로 고통을 받아온 도시였다. 이들에게 유신독재의 붕괴는 그동안 열망해온 민주화의 도래로 받아 들여졌다. 지나온 세월의 고통만큼이나 상대적으로 그 바람과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소외와 핍박의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갈망해온 호남인들에게 김대중은 그가 당시 유신체제의 박해를 받아온 이유만으로도 호남인들과 연결될 수 있는 정서적 동질성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5·17확대계엄조치와 함께 김대중의 구속은 광주시민들에게 민주화의 좌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학생들의 데모는 전두환과 유신잔당에 대항하는 시위였지 김대중 석방을 위한 시위가 아니었다.  “아침에 공수부대가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대학생들을 개 패듯 곤봉으로 때려서 대학생들이 시방 금남로에서 데모 할라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여기서 학생들한테 들었소! 아짐씨! 오늘 여기 금남로에 있다가는 큰일낭께로 어서 집에 가시요잉!” 그 중년 남성이 영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아들 찾아야 한당께라우!” 영례는 중년남성을 보면서 완강하게 말했다. “학생들 이야기 들어보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어라우! 아들은 다음에 찾으시오!” 그 중년남성은 영례가 모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전남대학생들이 아침에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했다는 소식을 중년남성에게 들은 영례는 틀림없이 희락이가 전남대생들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빨리 이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서 유동 쪽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남대 학생들과 함께 희락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갑자기 희락이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태산처럼 커졌다. 전남대학에서 아침에 더 큰일이 일어났다는 중년남성의 전언 때문이었다. “나 쫌 나가게 해주쑈잉!” “이 아짐씨 나가게 쫌 비키시게!” 중년남성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하여 영례는 가까스로 보도 위로 올라오는데 성공했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