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귀히 여기는 교회들이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처럼, 지금도 하나의 생명이 생을 마감하는 일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관심과 대책이 요구된다.  ⓒ 들소리신문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표현 신학적으로 근거 없는 말
교단 및 지역교회 차원의 상담소 및 상담사 운영 절실

1초, 2초, 3초… 40초가 흘렀고 이 순간 또 한 명은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40초에 한명 씩 목숨을 포기하는 오늘날, 한국은 OECD가입국 중 자살 1위의 불명예 타이틀을 지니고 오늘 하루도 평균 33명의 소중한 사람들이 생명을 버리고 있다.

프로이드는 자살이 개인의 심각한 우울증에서 동반된 산물로 치부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에밀 드르케임은 그의 `자살론'에서 사회통합의 약화가 불러오는 `이기적 자살'과, 규범이 약하여 나타나는 `아노미 자살'을 말했다. 사회통합과 가치관의 규범을 제시하는 교회들이 자살에 대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적극적 응답과 행동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얼마나 자살이 근접해 있을까. 2007년 정재영(실천신학대) 교수의 `자살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과 교회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전체 응답자 513명 중 자살 충동에 대해 19.2%가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했고, 이 중 실제로 자살 계획을 세운 사람은 14.5%로 전체 응답자의 2.8%가 구체적으로 자살 계획을 시도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드러나진 않았지만 많은 교회들이 교인 중 자살 시도나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알고 있다.

정재영 교수는 교회에서 강연하다 보면 꼭 한,두 분은 펑펑 우는 분들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자살자의 유가족일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도 자살이 큰 문제로 파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자살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나 교단차원의 기구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자살은 지옥이라는 도식이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데 인간이 그 주권에 도전했기에 지옥에 간다는 식의 윤리적 논리로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통설이 교회 안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자살의 결과가 지옥이라는 것을 명시해 놓은 성서 본문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전성민 교수(웨스트민스터 신대)도 `바른교회아카데미 세미나'에서 구약은 신학적으로 자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논리와 본문을 찾긴 어렵다고 말한다. 이상원 교수(총신대)는 `복음과 상황'에서 `성경은 자살이라는 특정한 행위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살을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에 성급하게 연관시켜 판단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들이 자살과 지옥을 연관 시킬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가룟유다 본문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상원 교수는 사도행전 1장 25절의 가룟유다가 `제곳'으로 갔다는 본문의 제곳은 분명 지옥일 것이나, 그 이유가 자살했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의 진정한 회개(메타니노이아)가 아닌 감정적인 동요와 뉘우침(메나멜로이)에 그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자살은 아퀴나스의 언급처럼 분명한 죄이지만 그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 하는 질문에 대부분의 교회의 응답은 그렇다고 결론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기현 목사(수정로침례교회)는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교회들이 용서의 폭을 넓게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바르트의 `자살이 심각한 죄라도 용납하지 못할 죄는 아니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나 역시 가룟유다와 같이 물질 앞에 나약해 지는 모습을 보는데, 만약 그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나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 능력에 한계를 긋는 것은 인간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신앙에 모순점을 만드는 일이라 지적하며 자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주장한다.

셋째로 교회가 자살을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공동체 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점이다.

정재영 교수는 `한국사회의 `자살'현상 이해'라는 글에서 자살은 사회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말한다. 자살이 시대와 사회가 변함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기에 개인의 우을증이 병리적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이와 더불어 사회적인 증세이기에 사회적 요인도 강조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즉, 사회가 점점 더 물질중심주의로 흐르기에 경제적 신분의 추락이 자아의 파괴로 느껴 삶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의 규범을 정립하는 역할을 교회들이 감당해야 하는데 과연 현대 교회는 물질중심 혹은 축복지상의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세상의 가치풍조에 동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요소이다. 그렇다면 심각한 자살의 문제를 교회들을 어떻게 풀어가고 자살방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첫째로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는 삶의 의미를 교회가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살시도 했던 A씨와 심층 면접을 시도했더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며, 만약 살아야 하는 한 가지 이유만 이라도 있었다면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고백은 교회가 자살을 예방 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정 교수도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실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추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교회가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치를 넘는 초월적 가치와 삶의 목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로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 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 소그룹 모임의 강화가 필요하다. 이영문 소장은(수원자살예방센터)은 바른교회 아카데미에서 `자살예방에 대한 여러 가지 소견'에서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안전망이 필요한데 교회의 소그룹이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실제로 이 소장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5년 째 진행해 온 또래상담이 그들 스스로의 고민들을 함께 공감하고 털어놓으며 해소의 공간을 제공해 자살예방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며, 교회 안에서도 세대별 혹은 구역별 소그룹 모임이 진지함과 솔직함을 전제로 이루어 진다면 교회의 소그룹들이 자살을 방어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는 교회 및 교단차원의 대책기구의 마련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동 세미나에서 “대책기구 설립을 통한 성서적 윤리적 차원에서 생명윤리에 관한 강령이나 규범을 제시해 줘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교단 혹은 지역교회 차원의 대책기구 설립으로 기구에서 운영하는 상담소나 상담사의 활용이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자살의 위험에 있는 사람들이 담임목회자나 주변의 교인들에게 내놓기 어려운 문제들을 꺼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으로 운영하는 상담소들과 지역의 센터 활용은 자살을 예방하는데 좋은 효과를 낼 것으로 평가된다.
교회가 등대로 서 어둔 곳곳에 빛을 비춰 밝음을 제공해 생명을 살려낼 때이다.


■ 자살에 관한 설교지침 ■

1. 자살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살은 복합적 요소(개인적, 심리적, 사회적)가 작용한 결과이기에 신앙 하나로 다정하여 말하는 것은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유가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자살한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가족이 어떻게 했길래 죽기까지 했느냐'는 언급은 남은 자를 더 힘들게 하는 언어사용이다.

3. 자살의 방법이나 장소, 경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구체적 묘사는 자살 불러온다.

4. 유명인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영웅시하지 않는다. 미화는 자살의 당위를 제공할 뿐이다.

5. 자살을 고통해결의 방법으로 설명해서는 안되며 남겨진 문제들의 시작임을 강조한다.

6. 자살을 흥미 중심으로나 흥미로운 예화로 사용하지 않는다.

목회사연학연구소(소장 조성돈) 제공/`자살에 대한 설교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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