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의 독일대학은 100여 년 동안 12개 정도로 발전하였다. 알프스 저 너머의 르네상스가 콘스탄스와 바젤을 지나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로 건너왔다. 독일 학생들이 이탈리아로부터 고전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이탈리아의 방종에서 독일로 유입되는 느낌이 있다. 인문주의가 16세기로 바젤대학, 퓌빙겐, 잉골스타트, 하이델베르크,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렬하여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많은 지도자들 중에 로이힐린(Johann Reuchlin)과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들 수 있다. 1455년 프로츠하임(Pforzheim)의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난 로이힐린은 일찍부터 라틴어 학자로 인정을 받았고, 1472년 경 파리대학으로 가서 헬라어 공부, 이미 1470년 교주 임용을 받은 그는 해박한 헬라어 지식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프로렌스와 로마에서 플라톤 아카데미 학자들을 만나서 감화를 받았고 유대신비철학 사상에 대한 흥미를 더 했다. 로이힐린은 르네상스가 학문의 중심에 서 주기를 바랐다. 그는 독일의 유대인 아닌 유대학자로 인정을 받아 구약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공부를 하였다. 드디어 그는 20여 년의 연구 끝에 1506년에 히브리어 문법사전을 편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루이힐린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다. 그는 15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교개혁의 발생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루터의 1517년이 있고도 5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후계자인 멜랑흐톤(Philip Melanchthan)이 개혁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멜랑흐톤은 루이힐린의 종손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멜랑흐톤은 마틴루터의 개혁의 동반자이다. 비텐베르크 성지에 가 보면 그들의 교회당 안에 루터와 멜랑흐톤의 무덤이 똑같은 크기로 양쪽에 자리해 있고, 광장에 나가봐도 루터와 멜랑흐톤의 동상이 각기 똑같은 비중으로 자리함을 볼 때 두 인물은 종교개혁의 쌍두마차임을 알 수 있다. 개혁의 전야를 지켜 낸 인물중 루이힐린과 함께 또 한 인물은 에라스무스이다.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Rotterdam) 또는 고우다(Gouda)에서 사생아로 1466년 또는 1469년에 출생한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다. 에라스무스는 학문을 사랑하였고, 그의 마음을 의지하는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경건훈련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가난이 그를 스테인(steyn)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게 했으며, 수도생활을 하고 1592년 안수를 받기도 했으나 신부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1495년 파리로 가서 1498년 신학사학위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스콜라 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1499년 영국으로 가서 콜레트(John Colet)와 모어(Thomas More)등과 사귀기도 하며, 키케로·소크라테스 등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의 대표자로 인정을 받는다. 에라스무스는 1536년 세상을 떠났다. 에라스무스는 학자였다.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인 마르틴 루터와 사이에도 사귐이 있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르네상스의 범위 안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학문에 진실했고, 루터의 혁명적 교회 운동에 큰 매력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는 혁명가이기에는 너무나도 이성적 인물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모순과 죄악에 대해서는 예리한 통찰력이 있었고, 또 이 부분 때문에 루터와 가깝기는 했으나 행동하지는 못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투쟁적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의 논쟁파들에게 모두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끝끝내 신부의 옷을 벗지 않았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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