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재세례운동)의 주요 사상과 지도자 멘노 시몬스

     
신앙의 절조를 위해 목숨까지 희생한 그들의 고귀함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들소리신문


"끝까지 국가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철저히 제자도의 삶 순복"

하나님의 사랑은 평등의 자유, 권력과 힘이 나눌 수 없어
제자도 지키려 했던 일사각오의 자세, 가장 시급한 덕목

종교개혁주일 매년 조명되는 루터와 칼빈.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로 철저하게 외면되었고 심지어 혹독한 박해를 격어야 했던 아나뱁티스트를 다시 돌아보고 재세례 운동의 부흥을 이끌었던 멘노 시몬스(사진)를 알아보고자 한다.


16세기 교권 타락의 끝을 보여주던 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면제부 판매의 부당성을 알리는 등 95개조 반박문을 선포하며 개혁을 시도했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외치며 개혁의 불길을 이어갔다.

그 모든 개혁의 중심은 예배와 성례전이었다. 사제 중심이었던 예배와 성례전을 성도 모두에게로 해방시키겠다는 목적이 종교개혁의 주된 모토였다. 사제의 뒤를 받쳐주던 교권의 고리를 끊고 사제에게 집중됐던 거대 권력을 성도 모두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완벽히 지키지 못했다. 루터나 칼빈 자신도 개혁에 힘을 실어주던 세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더욱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해 간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나뱁티스트였다. 초기 츠빙글리와 함께 종교개혁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츠빙글리조차도 국가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고서 결별 후 독자적 행보를 갖는다. 이들은 국가에 예속된 교회나 신자에게서 교회의 타락과 기독교의 순수성이 사라졌다고 보았기에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다.

분리를 위해 이들이 주장한 것은 올곧은 제자도의 삶이다. 제자로 결단하지 않고서는 개혁은 물론, 예수의 삶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재세례를 주장했다. 그 당시 신자의 필수요건인 유아세례를 넘어, 이성적 의식의 결단 앞에 스스로 고백하는 세례가 세례의 본래적 의미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과 성례전보다 심령에 나타나는 성령의 직접 계시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주장은 칼빈과 루터, 츠빙글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결국 아나뱁티스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1525년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강령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2,000여 명이 수일 동안 죽기도 했다고 말하는 자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박해 속에서도 겸손과 인내로 장엄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에서였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잡으러 왔던 말코의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에게 칼의 복수를 금하라 하셨기에 그들은 말씀 그대로 살 뿐이었다. 뮌쩌와 같은 급진적 아나뱁티스트들은 농민 봉기와 같은 폭력적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후대까지 적절치 못한 처사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이들은 16세기 심한 박해로 사라졌지만 풍파 가운데 들꽃이 굳건히 피어나듯 순수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 나타났다. 그가 멘노 시몬스다. 지금까지 그 이름을 이어받아 유럽각지에서 메노나이트로 활동하고 있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있을 정도다.

멘노 시몬스는 1496년 경 네델란드 프리슬란드 주 비트마르숨에서 태어났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1524년 경 28세 되었을 때 신부서품을 받는다. 신부가 된 후 그는 멘노시 중심에서 재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잔인한 학살에 충격을 받고 재세례가 사람의 목숨을 해 할만큼 위험한 요소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유아세례에 대해 적극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충격이 가시기 전 그는 1535년 뮌스터 아나뱁티스트들 400여명이 시몬스 집 근처에서 집단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중에는 멘노 시몬스의 형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 개혁을 말하는 신앙인들끼리 저렇게 무참히 죽일 수 있는가'라는 분노와 기존 교회에 회의감을 느끼고 1537년 경 재세례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열심과 굳센 결의로 재세례운동의 중흥을 이끌었다.

워낙 유능한 지도자이기에 정부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심지어 멘노 시몬스를 숨겨준 사람에게까지 현상금을 걸 정도였다. 그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공적인 맹세, 물질의 나눔을 통한 소유의 포기와 섬김, 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하는 평화의 실천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멘노 시몬스는 순결과 자유,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 바치고 그의 나이 65세에 생을 마감했다.

멘노 시몬스의 활동과 사상이 중요한 점은 칼빈이나 루터처럼 세속국가의 협력을 받는 일종의 동맹관계를 맺고 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권력의 힘을 빌리기는커녕 로마교회와 같은 개혁세력인 프로테스탄트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으며 활동했다. 종교 아닌 신앙의 본질을 예수처럼 이 땅에서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와 아나뱁티스트들이 박해받은 이유다. 그들은 교회를 참되게 지키려면 오직 사랑의 힘과 단순한 복음이면 넉넉하다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 외의 어떤 힘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이기에 평등의 자유를 강조했다.

평등의 자유는 교회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눠지는 계급적 대립의 종식까지를 말한다. 교회가 쥐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신자들과 더불어 평등한 자유를 누리는 `형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루터가 만인제사를 들고 나왔지만 1524년 농민전쟁에서 농노의 손이 아닌 귀족의 편을 들며 그 스스로 만인제사를 포기해 버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멘노를 중심으로 한 아나뱁티스트들은 철저하게 지조를 지켜왔다. 만인제사만이 영원한 교회이자 이 땅의 하나님 나라 실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후손들 150여만명은 전 세계 곳곳에서 재세례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메노나이트 공동체는 평화와 비폭력 운동을 위해 갈등해결 프로그램을 만들어 분쟁국가 및 교회에 전하고 있고,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는 환경파괴와 물질만능의 신 자유주의 시대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외형적 모습은 비대해졌으나 내실은 초보적인 한국교회. 예수께서 보이셨던 구원받은 자의 삶의 고귀한 진리마저도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성장 앞에서 변질시킬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지금의 모습은 `복음'을 위해 목숨마저 희생했던 아나뱁티스트들의 순수성이 현재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종교개혁 당시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며 개혁하려 했던 요소들이 현재 한국교회 안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492주년 종교개혁주일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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