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교 간 대립인 30년 전쟁과 오늘의 한국교회

        
          브라이텐벨트 전쟁에서 승리한 스웨덴 군대와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들소리신문

“신·구 대립이 부끄러운 전쟁되었다”


정치적 세력 유지를 위한 신앙의 변명, 30년간 유혈의 역사
전쟁의 결과, 기독교 무신론과 이론철학의 강한 영향 받아

종교개혁을 맞이해 2주 연속 재세례파 운동의 역사적 과정과 신앙을 연제했다. 종교개혁 492주년을 기념해 가톨릭과 신교간의 대립이 빚었던 유럽의 30년간의 유혈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세계교회를 돌아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1517년 일어난 종교개혁은 17세기 유럽의 얼굴을 바꿔놓았다. 종교적으로는 강력한 정교 일치로 세상을 지배하던 왕권과 교권 세력의 일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이후 기독교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시작될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의 파문을 요청하며 보낸 협박장에는 “한 마리의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오 베드로여! 당신의 피로 성별된 모든 교회의 어머니는 거룩한 로마교회의 형편을 살피소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를 본 루터는 교회법령과 이 편지를 불에 소각하며 “그들이 나의 책을 불태웠으니, 나도 그들의 책을 불 태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는 종교개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첨예한 갈등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증표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의 물결이 북부독일, 스칸디나비아반도, 영국, 폴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던 시기에 가톨릭 각성운동인 반 종교 개혁 운동, 곧 `예수회'가 일어났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성직자 교육과 교회 악습철폐와 종교재판을 통한 이단척결을 목적으로 했다. 그 중심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가 있었다.

예수회 창시자인 로욜라는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신교의 유럽을 재 개종 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종, 독신, 빈곤을 모토로 한 예수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었고 신교 지역에서 잃어버린 형제를 되찾기 위해 활동하다 보니 충돌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4차에 걸친 전쟁


당시 보헤미아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보헤미아 안에는 신구교간의 여러 차례 불협화음이 있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신교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앙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 황제 겸 보헤미아의 왕 마티아스도 양쪽진영에 대한 융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617년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 왕에 선출되면서 신교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프라하 대주교령에 있던 신교의 예배당들이 철거되었고, 신교 신자들은 이에 항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그러자 신교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황제군과 싸워 승리한다. 이 전쟁은 전 유럽의 잔혹한 30년 역사를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의 봉기 후 신교의 지도자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된 칼빈파 프리드리히 5세는 여세를 몰아 전쟁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주변 개신교 국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칼빈파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협조를 꺼렸다. 그때 시간을 번 가톨릭은 지도자 바이에른공 막시밀리안의 협력과 에스파냐의 원조를 얻어 반격했고 1620년 11월에 프리드리히 군을 대파한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는 `한 겨울의 보헤미아 왕'이 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1625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의 신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 영국과 네델란드의 원조로 북 독일을 침입한다. 곤경에 빠진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장군으로 임명하였고, 뤼테르 전투와 1628년 9월 볼가스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발렌슈타인은 뤼테르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제국 내부 상황에 대한 일체 간섭을 금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1630년 세 번째 전쟁이 스웨덴에서 발발한다. 발트해역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참전으로 일어난다. 아돌프는 황제의 북진에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의 원조로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631년 브라이텐벨트 전투에서 황제 군에게 승리해 그동안 잃었던 땅을 회복하였다. 전쟁에 패한 황제는 화평책을 이유로 장군으로 내세웠던 발렌슈타인을 암살했고 1634년 황제의 군대는 황제의 아들이자 헝가리 왕인 페르디난드3세에 의해 재편성되었다.

황제군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호론과 베른하르드가 지휘하던 스웨덴군은 뇌르들링엔에서 1634년 황제군에게 패하고 신교 대부분 국가들과 프라하 조약을 맺는다. 프라하 조약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해 방위하여 줌을 말하는데 이 조약의 최종 타켓은 계속해서 신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던 프랑스가 있었고 결국 30년 전쟁의 마지막 4기에 프랑스가 참전한다.

가톨릭 국가의 대표적인 프랑스가 신교의 전쟁에 적극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종교가 종교적 의미를 상실하고 정치의 도구가 됐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제 프랑스가 전쟁의 전면으로 나섰다. 프랑스 군은 스웨덴과 연합하여 황제 군을 공격했다. 황제군의 전쟁을 주도하던 페르디난드 2세가 죽고 페르디난드 3세가 황제가 되자, 오랜 기간 이어온 전쟁의 피로와 계속되는 수세에 황제군은 프랑스, 스웨덴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며 30년 전쟁을 마감한다.


# 전쟁이 남긴 상처


전쟁에 승리한 프랑스와 스웨덴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해 많은 이득을 보았고 스위스와 네델란드는 독립을 얻게 된다.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분명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전쟁 전후로 칼빈파와 루터파의 미묘한 대립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분열시켰다. 그리고 신구 기독교 교파와 교리의 대립의 결과물인 30년 전쟁 후 사람들은 신앙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눈을 돌렸고 이는 계몽주의 철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유럽의 중심축인 기독교가 무신론과 이론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명분을 위해서 전쟁마저 일으킬 수 있는 `신앙의 변명'은 전쟁에서 방법만 바뀌었을 뿐이지 지금도 유효하다. 물론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사조가 신학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가슴으로 만나던 그리스도를 멀리 떠나보낸 책임은 피할 수 없으리라 본다.

이는 무한한 양적 성장을 기치로 기독교의 거대화가 주는 일말의 긍정적 요소보다는, 교회의 해체마저 바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시대의 책임 또한 세계 교회가 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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