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칼빈학회 회장 이양호 교수에게 듣는 칼빈의 예정론과 구원론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운명론 인가?”



칼빈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의 구원론은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로 정의된다. 그런데 칼빈의 믿음으로 받는 구원 앞에는 예정이 따라 붙는다. 이처럼 중요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혹, 예정론을 `내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천국과 지옥이 정해진 운명이야'정도의 이해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물음을 갖게 된다.

이에 종교개혁 마지막 테마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 조명해 보며, 칼빈의 예정론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과 21세기 칼빈의 예정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이양호 교수(사진/연세대)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양호 교수는 한국칼빈학회 회장직을 지냈고, 올해 `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 및 기념사업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신학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칼빈의 예정론과 구원론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해주었다.


 △장로교 전통에 속한 교회 신자들도 칼빈의 예정론을 잘 모르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을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허락한 은총의 선물'이라 요약할 수 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죄인된 인간은 공적이나 선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벌하심을 받아야할 마땅한 존재들로 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을 벌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은혜를 내리셔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셨다. 그렇기에 칼빈은 공로에 의한 구원을 반대했다.

그런데 그 구원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선택과 예정'이라는 이중선택으로 예정하셨다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신 영원한 작정이라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구원 받은자와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의지 안에 예정되었다고 칼빈은 말한다.


△예정설은 운명이 정해져 버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칼빈의 예정론은 운명론을 말하는가.


칼빈은 누가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의지'라는 부분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이는 중세시절 사제들의 면제부 판매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행위를 통한 구원의 공적에 대해 문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적이 하나님의 은총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하게 된다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일치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중요한 요소였고 그 여부는 하나님만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구원의 여부는 운명적으로 정해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원의 대상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보편적 상식에서 이해하는 운명론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이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하나님이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선택하신 후,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정하셨다는 의미이다. 결국 예정론에서 중요한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지 인간속의 어떠한 원인도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예정론이 강조되다 보면 행위와 공적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을 칼빈은 어떻게 극복해 가려 했는가.


칼빈은 예정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는 철저한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임이다. 이 뜻은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보호로 견인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복음전파와 삶으로의 모범을 결과로 보인다는 의미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총이기에 모두가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감격은 너무나 크기에 죄된 생활의 모습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에 대한 배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자가 철저하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당연한 결과물이라 칼빈은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점붙임은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결단이기에 생활로 보여지는 신앙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질문에 현실적 이야기를 접목시켜 보면 구원받은 자들은 많은데 삶은 그렇지 않게 보인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이라 보는가?


재미있는 건 칼빈은 일생동안 회개하는 삶을 강조했고, 성령을 통한 선택한 자의 마음을 개조시켜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영과 육 모두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self denier)을 자주 강조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의 의를 이루는 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의 욕망을 끊고,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라 했고 칼빈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기에 구원에 감격에 감사하며 매일의 회개와 육적인 자기를 죽임이 이어질 때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된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엉뚱한 질문 한가지 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의 구원 여부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칼빈의 선교 개념으로 설명하고 싶다. 칼빈은 “양의 우리 밖에도 많은 양들이 있고, 양의 우리 안에도 많은 이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의 역사를 놓고서 교회는 복음전파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라 본다. 그리고 처음에도 언급한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은 구원 받은 자의 여부를 알 수 없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이기에, 우리는 다만 전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구원 여부보다 우리가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생산적인 고민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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