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와 보은 사이에서

올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의 시청률이 최고다. 우리나라 국민 전체에서 95.6%가 한 번 이상 이 사극을 보았다는 통계도 있으니 놀랍다. 등장인물 가운데 중심인물은 단연 미실이다. 미실의 직책은 새주다. 새주(璽主)는 옥새를 관장하던 중직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미실의 모습과 진행되는 이야기는 역사적 실재와 많이 다르긴 해도 역사적 소재와 오늘의 현실을 연결하여 이만큼 시청자의 관심을 끌게 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역사적 사실은 뒤로 물리고 드라마로만 얘깃거리를 삼는다.

미실새주는 육적인 색(色)과 신적인 지(智)로써 신국(神國) 신라의 권력을 움켜쥐었다. 사람을 끄는 정치력과 하늘 뜻을 따르는 대의로써 권력을 이어갔다. 신국을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자신과 신국을 동일시했다. 미실이라는 인간 자아에서 권력과 사랑은 하나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는 것과 자기 사람을 만드는 일이 다르지 않다.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캐릭터는 `초국가적 자아'다. 내가 곧 국가라는, 왕권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인간형이다.

미실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세에 몰린다. 대야성으로 들어가 농성(籠城)하는데 백제와 접경인 속함성 성주 여길천이 2만의 정병을 이끌고 도우러 온다. 미실은 여길천에게 회군을 명한다. 이런 미실의 모습은 군 병력을 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근대사의 인물들을 질타하는 작가의 분신일 수 있고 작가의 문학적 특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 속의 캐릭터로만 보면 미실의 회군 명령은 현대적 의미의 나라 사랑은 아니다. 그저 초국가적 자아상에서 나타나는 인간형의 단면일 뿐이다.

이토록 카리스마가 강력한 미실의 주변에 미실의 사람들, 미실의 남자들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혈연관계를 옆으로 밀어놓고 보면 대표적인 인물이 칠숙과 석품이다. 석품은 미실의 은덕으로 화랑이 되었다. 석품에게 미실의 결정과 행동은 언제나 대의였다. 그래서 석품은 행복했다. 그러나 난이 진행되면서 석품은 처음으로 미실의 길이 대의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고민하지만, 석품은 대의보다 보은하는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무공이 강하고 기강이 높고 충의가 깊은 칠숙도 같은 고민을 하고 그리고 똑같이 결심한다.

칠숙과 석품은 대의명분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캐릭터다. 간사하거나 비굴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상황에 따라 말이나 입장을 바꾸느니 명예와 절개를 지키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형이다. 그들의 고민은 이것이다. 대의냐, 보은이냐. 칠숙과 석품의 난이 전개되면서 두 사람은 싸우다 죽는다. 그런데 사실은 자결이다. 상대방의 칼을 끌어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대의와 보은 사이에서 대의를 선택하는 게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미 걸어온 길이 너무나 멀고 깊어서 보은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이런 고민에서 둘은 제3의 길을 택한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길이다. 그러고 보면 미실과 미실의 두 남자 칠숙과 석품은 모두 자결을 선택했다.

미실은 갔다. 더 이상 드라마에서 미실이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남는다. 미실과 미실의 두 남자가 너무 멋지게 갔다. 미실의 죽음 앞에서 정적 덕만까지도 경의를 표하지 않았는가. 초국가적 자아상을 가진 인간형이 제왕의 시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법치국가에도 존재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자신의 심정에 극도로 진지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데 대해서 토론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미실형 인간'이 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힘든 까닭 중 하나가 이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미실의 사람들' 때문이다.

남은 드라마를 어떻게 끌어가고 마무리할지는 작가의 몫이다. 어차피 대중 드라마니까 흥행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데야 뭐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미 무대에서 퇴장한 미실이 너무 이상적으로 그려져서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을 질타한 작가의 말이 어설프고 씁쓸할 뿐이다. 이 정도 시청률을 가진 드라마가 일반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동물적 감각으로 꿰고 있을 작가가 작품의 흥행과 사회적 책무 사이에서 조금은 더 깊게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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