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메시지, 삶으로 이어지게”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신 뜻 깊은 절기에 목사님과 귀한 시간을 갖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성탄절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부분에 집중해서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신 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성탄절이라고 하면 다 아는 얘기 같지만 모르는 것도,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알기는 하는데 삶으로 살아내지는 않는 부분도 있구요.

예수님이 오신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림하실 때도 공통되는 의미를 살펴보면 ‘영광’과 ‘평화’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천사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신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유혹하는 것,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은 죄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우리는 피조물임을 인정하면 인간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가 ‘평화’입니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를 보면 평화가 지속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갈등과 싸움의 연속이었지요. 그런 세상 사람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평화인데, 사람은 영광을 가지려 합니다. 영광은 위험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가지려 합니다. 평화를 한자로 살펴보면 평평할 ‘평(平)’, 화목할 ‘화(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것처럼, 더불어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이 예수님이 탄생할 때 찬송한 평화는 신약 4복음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얘기하신 것은 ‘평화(평안, 에이레네)’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들려온 메시지가 평화였는데,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평생을 ‘평화를 일구는 데’ 혼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2천년 전이나 오늘의 성탄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느끼기에 지금의 것들이 특별해 보이겠지만 어느 시대나 그렇지 않았을까요? 독일에서 공부할 때 1700년대 초에 씌여진 어떤 편지를 봤는데, 그때도 ‘시대가 너무 빨리 변화한다’고 했더라구요.



★ 평화가 개개인들에게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죄와 죽음의 권세가 싸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결박할 때까지는 아마 그럴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그 의미가 오늘날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고, 대안은 무엇입니까?

= 많은 부족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헌신과 연대를 꼽고 싶습니다. 개인이나 단체, 사회 구조 차원에서 쉽게 이뤄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평화에 대해 알고 누리고 있는 이들의 헌신과 연대가 넉넉하지 못하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헌신은 개개인이 자기를 드리는 것이고, 연대는 그런 사람들이 묶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간의 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족하면 평화가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개인이 진지하게 헌신해야 하고, 거룩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자, 두 번째 파루시아를 고대해야


★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메시지가 사라져버린 듯, 현실 모습에 안주하고 있는 경향이 짙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메시지를 직설법으로 들어야 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실존적 의미로 축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한 부분에서만 경험하는 내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객관적이고 우주적인 것으로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림의 메시지가 약화된 것은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전파돼서 어느 정도 이상으로 커지면 사회 조직상으로 재림 메시지가 약해집니다. 사회적으로도 기독교 그룹이 존재하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풍요로워지면 그런 메시지가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오늘날 재림 메시지는 좀 더 강화돼야 하지 않을까요?

= 그럴 필요성이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 연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신 것을 헬라어로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첫 번째 파루시아는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고, 두 번째 파루시아는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회고하고 회상하면서 낭만에 젖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파루시아 하나님의 오심을 통해 두 번째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모습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신앙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변색됐다, 퇴색·퇴조됐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차적으로 절기가 담은 의미가 약해집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의 절기는 신앙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명료하게 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가 퇴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부활 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도 하신 말씀 ‘평화, 평화’

★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조차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신앙의 모습이 참으로 미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 인카네이션을 성육신이라고 한 번역은 잘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되셨는데 ‘무엇이 육신이 되셨나’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와 같이 사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은 계십니다. 임마누엘을 어떻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66권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이 미약한 것을 극복하는 길은 절대로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른바 환원운동을 살펴봅시다. 폴 틸리히가 루터에 대해서 말하기를 ‘루터는 환원의 천재’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예수님 탄생부터 루터시대까지 1500여 년의 역사, 문화 등을 모두 옆으로 치워버리고 예수님에게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갱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중간을 뛰어넘어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육신, 인카네이션, 임마누엘의 신앙을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성경말씀 66권을 읽고, 깊이 묵상해야 하고, 내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이 묵상하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얘기하면 할수록 유혹이 많아집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펼쳐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말씀묵상에 더 집중해 나간다면 성탄절의 의미가 더욱 더 살아움직일 것입니다.


★ 좀 다른 질문일 수 있는데, 왜 예수님은 마굿간에 오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이 누워계셨던 마굿간은 어디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이것은 오랫동안 해왔던 아주 전통적인, 클래식한 질문입니다. 그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꿈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앞에 거지가 나타나니 더럽다며 쫓아냈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렇듯 주님은 가난하고 힘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 속에 살아계십니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배워왔던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나이 드셔서 외로운 사람들에게 좀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특별한 때만 잠깐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한번도 못할 수 있습니다. 기회가 닿을 때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 된’ 성육신…오늘 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의 은총


 ★ 소외되고 힘 없는 사람들 얘기를 하니까 용산참사가 생각납니다. 아직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해를 넘기는 것 아닌가 하며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모두들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정부 여당이나 보수적인 측면에서는 전철연이나 제3자가 개입됐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재벌들이 개입됐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같이 보통사람으로서는 정확한 정보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진보나 보수계열의 언론들도 팩트(fact)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팩트를 밝히기 전에 정치화됐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팩트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팩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고귀한 생명이 죽었는데, 통상적인 인륜의 입장에서 보면 정중함과 예의를 갖춰서 장례가 진행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정치적 입장을 떠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 예전에는 성탄절이 되면 비기독교인들도 축제적 분위기에 젖곤 했는데, 요즘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도 조용한 것 같습니다. 좋은 현상인가요?

= 축제를 구성하고 펼치는 기능이 옛날에는 교회 외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경제력과 함께 서비스업이 가장 크게 발달되었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축제를 구성하고 펼치는 기능이 사회적으로 너무 발달이 돼 있습니다. 교회가 구성하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지요.

★ 주님의 가르치심은 변함이 없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의 사회 신임도는 민망할 정도입니다. 특단의 대책은 없을까요?

= 본질적인 의미의 성탄, 메시지가 특단의 대책이 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의미를 생각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명예와 돈을 누리지 않고, 동료 목회자들, 교단간, 같이 한 교회를 섬기는 장로와 성도들이 평화의 메시지를 삶에서 이뤄내기 위해 애쓴다면 존경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가 갑자기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닌데, 5년 정도의 기점으로 더 타락했다고 하는 민망한 분위기는 안티기독교인들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임도 문제를 말하는데, 사실 예수님 이후 2천년 내내 그랬습니다. 일제시대 춘원 이광수가 목회자의 자질·수준 문제, 리더십 등을 문제 삼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눈 감아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깊이 인식하고 각성된 시각을 갖고, 문제를 헤쳐나가려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횡축으로 보는 그런 시각과 동시에 역사의 흐름과 연계되는 종축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역사 흐름의 긴 시야(시간)를 보면 너무 비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계주를 할 때처럼 우리는 현재 바통을 이어 뛰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실하게, 열심히 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너무 비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분주한 시간에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성탄절이 되십시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