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임마누엘 예수는 인류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고, 낡은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창조세계를 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하신 말씀의 뜻을 헤아리면 하나님의 미래 설계에 대한 계획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세상에 오셨다. 그 중심의 뜻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에 근거한다. `이처럼 사랑하사'. 마치 인간을 하나님 처럼 살게 하시려는 듯한 파격으로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 사람들 중 다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말씀의 참 뜻을 모르고 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신다' 함이 무엇인가? 존재의 변화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사는 방식의 전환이다.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함께 죽었다'는 이 말씀은 `관념어'가 아니라 `사실어'이다. 구체적인 실증이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이 고백 이후 그의 인생을 마치 예수처럼 살아갔다.


어떤 이들은 신자가 예수처럼 산다는 용어에 거부감을 갖는데, 이는 마치 예수께서 그 자신을 표현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호칭을 참칭하신 것이나 도용하신 것인 양 여론을 호도하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때와 비슷한 형식이 되겠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는 확실한 자기 이해를 해야 한다. 기독교가 세속의 종교들과 다를 바 없는 미신과 기복의 수준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불교나 이슬람의 종교와는 다르다. 그들은 철학과 맹목적 숭배로 신앙의 참된 가치를 왜곡했다. 불교의 경우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되고자 했으며, 이슬람 또한 하나님의 섭리인 `대속의 메시아'를 놓치고 신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으르고 고집만 내세우는 이들의 형편에 머무르고 있다.


기독교는 종교의 껍질을 벗어야 한다. 즉 예루살렘과 결별해야 한다. 예루살렘은 모세신앙의 극치일 뿐이고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시는 길에 장애였다. 메시아는 그래서 예루살렘이 아닌 골고다에서 새 종교, 종교 아닌 종교, 종교의 벽을 넘는 새 종교의 시대를 열었다. 골고다 이전에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헐어라…'(요 2:19) 하신 분명한 요구를 하셨다. 하나님의 참된 성전은 짐승 잡아 드리는 맹목과 위선이 아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3). 


위의 두 말씀을 음미해보라. 우리의 메시아 예수는 이사야 1장을 읽으시면서 요한복음 2장 19절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잠시 당황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하신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종교의 벽을 뛰어 넘으라. 한사코 비켜서라. 기독교는 맹목의 종교가 아니다. 제사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사람들과 함께 한복판에서 사람의 삶을 살고 계시니 하늘 쳐다보지 말고 자기 곁에 계신 그 분과 함께 `하늘살이' 같은 인생의 무대에 모두 서라.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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