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웃 아저씨 대접을 받는 예수님을 보았을까. 참으로 내 마음이 크게 아프네.

 

[21C 이렇게 대비한다] 만인제사 성취 못하면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사생아

 

목숨이 아까워서 종교개혁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며,
그래서 저 많은 신자 지망자들(신자들)을
'목자 없는 양 떼들' 만들고 말자는 노릇이 되고 있다.

어찌하여 이웃 아저씨 대접을 받는 예수님을 보았을까. 참으로 내 마음이 크게 아프네. 주님은 만유의 주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오사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처럼 살게 하시려 했다. 또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이들과 가까이 사귀며 장차 너희가 내 나라의 상속자라 하셨으나 듣는 이가 많지 않다.

오늘 사순제(四旬祭) 막바지 숨을 고르며 죽음의 산 언덕을 바라본다. 그 말씀 중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하신 이 대목의 말씀이 오늘의 시간, 즉 고난절 기간에 교훈이 되겠다.

물론 해마다 오는 사순제, 고난과 부활의 절기가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자 하는 때인지라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조바심의 일단이 `예수님을 이웃집 아저씨' 취급하는 자, 감히 성직자 될수가 없는 자들이 거룩한 곳에 앉아서 세상 호령하는 꼴이 안하무인(眼下無人)의 무리들 같아서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아무에게나 뱉어낼 정도여서는 안됨을 아는 내 마음인데 왜, 왜 이럴까? 내 수양이 아직 부족해서라면 답은 쉽겠으나 이 또한 자칫 핑개요 면피용 발언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주요 위치에 예수 대접할 생각이 없는 이들이 살쾡이들처럼 도사리고 있는데, `내가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작가요, 선비요'하고만 있겠는가.

기독교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여 만인제사(萬人祭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을 종교개혁 또는 본체 회복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때 유럽과 세계의 양심이 이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1525년 농민반란이 루터의 묵인으로 제압한 독일 영주들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고가 났다. 바로 그해 루터나 쯔빙글리의 개혁을 실패라고 고발하면서 재세례파(Anabeptists) 세력들이 `평민적 자유'의 깃발을 들고 재개혁 또는 제2개혁 세력으로 등장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무자비한 정치와 종교 지배세력들의 공모와 합작에 의해서 수난과 죽음을 당했으며 오늘의 현재 후터라이트, 멘노나이트, 아미쉬(Amish) 등의 잔존 세력들이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안이 진실했다면 오늘의 기독교(신교)는 만인사제의 기초 위에 예수께서 소원하고 계획했던 하나님의 지상나라를 세워 그 본체의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지금의 기독교가 그게 진짜 기독교인가? 로마 가톨릭이야 제 집 지키고 천천년 낡은 가문을 지키는 종교노릇으로 만족하지만, 기독교는 그 본디 사상이 종교 아니다. 종교 아닌 종교, 모세의 성전주의와 율법종교가 아닌 달리 붙일 이름이 마뜩지 않아서 종교라 하지만 예수께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 또 하나의 종교는 아니었지 않은가?

기독교에 생각이 있고 뜻이 있다면 어디 한번 입을 열어보자. 그리고 겁도 없이, 또는 해낼 용기도 없는 겁쟁이들이 `만인제사'라고 하는 큰 것을 들고 나왔으면 제대로 된 종교 하나 만들어낼 생각을 했어야지. 지금 우리들은 뭘하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 신교는 `만인제사'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중세로마 가톨릭의 사생아(私生兒)일 뿐이다. 크게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분하고 억울하다. 목숨이 아까워서 종교개혁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며, 그래서 저 많은 신자 지망자들(신자들)을 `목자 없는 양 떼들' 만들고 말자는 노릇이 되고 있다.

요한복음 12장 23절을 펴보라. 헬라인들이 예수 만나자 했던 그 시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신 말씀 앞에 서 보자.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 죽음의 시간이 왔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렇지, 죽어야 사는 것이다. 천하 인간들의 죄를 그 가슴에 않고 죽으신 예수시다. 죽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예수는 성전종교와 율법종교의 하수인들인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살인극의 제물되는 수밖에 없으셨다.

그리고 오고 오는 인류는 모두 그 가슴, 고난과 죽으심에 동참하여 구원, 곧 생명의 영원에 참여하는 은혜의 날들을 살게 되는 것이다(갈 2:20). 이 말씀을 온 정성으로 받으면 영생이요 무한 자유의 세계와 마주친다.

그 날들의 주인공은 예수생명에 참여한 자 모두의 것이다. 단,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또 그 영광된 부활이 나의 영원한 생명임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내가 이렇듯 정확한 증거를 대면서도 왜 내 주변은 이리도 안타까운가? 내가 `들소리' 시작할때 한 5년 쯤이면 내가 죽을수 있겠지 했는데 33년을 질질 시간만 허비하면서 이 꼴인 그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마 나는 잘 모르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아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모진 인생,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한 시므온이 생각난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 그리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하는 기록을 보면 시므온은 주의 영광의 날을 보기 전에는 죽지도 못했던것 같다. 시므온 같은 신세되어 주님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이렇게 내 가슴 쥐어 뜯어야 한다.

달콤한 음감을 살려서 산꽃 이야기나 들새소리 같은 글, 감칠맛 나는 엣세이 나도 제법 쓴다. 소설 습작기 20년을 거친, 그래도 명색이 작가인데 왜 글 만들줄 모를까.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그 보다는 신흥 무관학교 같은 것을 만들고 만주나 시베리아는 물론 아메리카를 오고 가며 잃어버린 나라를 찾자는 지사형 인물로 늙어갈 수 있어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교회 도둑들은 들이시오. 예수님을 포로로 잡고 예수의 기독교를 모세의 성전종교로 바꿔치기 하고 예수께서 내버리신 제사장제도 다시 만들어 그 노릇하면서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메단자들아, 또 그 후손된 자들아. 이제는 그만하라.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이 무섭지도 않은가.

아, 이제 내게도 영광의 날이 왔으면 한다. 주와 함께 있음이 내게는 훨씬 더 좋으련만 내 주 예수의 고난 내 몸에 가득채울 때까지 갈길 아직 더 남아 있구나.〈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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