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서의 선교현장 돋보기(10)-인도네시아 ②

말루쿠군도의 역사


말루쿠섬에서 1999년 말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회교도들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학살 사태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루쿠섬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아체주의 분리독립 움직임 그리고 최근의 이라얀자야 지방의 분리 독립 움직임 등 국제적으로 주목 받을 만한 이슈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말루쿠섬 사태는 세계의 주목을 그리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약 보름간 암본섬에서 지하드를 선포한 회교도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로 약 1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비로소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말루쿠섬 사태의 기원은 16∼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루쿠제도는 향신료의 섬으로 알려질 정도로 향료의 생산량이 많아 경제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한 나라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들 식민제국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는데 이들은 모두 회교도들이었다.

이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자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말루쿠 원주민들을 용병으로 육성하여 인도네시아 회교도들과 대리전을 벌이게 했고 이때부터 양 종교 간의 대립과 반목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립과 반목이 심화된 것은 인도네시아 독립 후였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자바계 회교정권은 기독교지역인 말루쿠 주민들에 대한 종교적, 종족적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말루쿠제도로 회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이주민들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 하에 월등한 재력으로 상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반목은 종교적, 종족적 반목에서 경제적인 반목으로까지 확대된다.


대학살의 발단은 사소한 사건에서

양 주민들의 갈등이 본격적인 유혈사태로 비화된 것은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99년 1월 경 말루쿠제도의 암본섬에서 기독교인인 운전기사가 몰던 버스가 회교도 소년을 치는 경미한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사고 원인을 놓고 승객들 사이에 가벼운 말다툼이 섬 전체로 확대되어 처음으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시작된 양측의 충돌은 인근 할마헤라섬, 세람섬 등지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2천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말루쿠제도는 양측의 처참한 살육전장으로 변했다. 특히 '99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보름여 동안의 충돌로 무려 1천여 명이 사망하고 상가와 가옥 수십만 채가 불에 타는 등 무정부상황에 빠졌다.

이때까지 수수방관하던 정부는 그제서야 진압병력을 파견해 진압에 나섰다. 와히드 당시 대통령의 뒤늦은 중재노력과 진압군의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회교의 적대감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 4월 회교 과격파 지도자들은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수천 명의 회교도 젊은이들을 한데 모아 군사훈련을 시킨 후 말루쿠섬으로 파견하여 무방비 상태의 기독교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하드 전사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해야 할 정부군 역시 대부분이 회교도들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회교도들을 돕고 있으며, 이로 인해 최근까지 약 5천 명이 사망하고 5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 난민들은 대부분 정글로 피신해 맹수들과 회교도 추격병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일부는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이후 양측 간의 평화협정의 체결로 사태는 대체로 마무리 되었으나 말루쿠 지방에서의 양 종교 간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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