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부터 영성(靈性)이라는 이름의 용어가 한국교회서 흔하게 사용되었다. 마구 쓰여지기 시작한 때를 계산해 보는 것이다. 이 용어 사용의 배경에는 두 가지 사용자의 견해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신령한 분위기, 말 그대로 영적 환경을 표현하는 어법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의 `영성'의 사용처가 있다. `성령님'의 이름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성령님을 함부로 대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정쩡한 용어로 영성(靈性) 어쩌구… 하면서 얼버부리려는 음모가 영성이라는 용어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실체는 대개 십자가의 대속(代讀)을 믿지 않으려는 단성론 신봉자들이기 십상이다. 아닌 경우는 영성이라는 용어 속에 도사린 음모를 모르고 따르는 자들이다.

영성은 영적인 분위기,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과 인간인 나와의 관계를 표현하면서 `성령'이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감히 하나님의 신성에 가까이 하려는 목표가 자기 신앙의 소원이라면 성령 하나님의 터전으로서의 나, 더 줄임말로 한다면 성령의 사람인 나, 성령의 성품을 따라서, 성령님의 뜻을 좇아서라는 용어가 등장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자의 삶에는 `오직 성령'이 계실 뿐이다. 성령을 모시는 삶을 말할 때 `영성'이라는 수식어 또는 형용어가 우리에게 끼어들 틈이 없다. 만약 성령께 사로잡혀서,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일 경우는 `영성'이라는 용어를 포기하고 `성령님'을 앞세우는 삶의 진솔함이어야 할 것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유일한 자기 본연의 위치를 찾는 신분이다. 신자의 영원한 처소는 오직 `성령 안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믿는 자가 성령과의 만남의 중재자로 `영성'이라는 불확실한 단어를 차용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로마 가톨릭의 `연옥' 비슷한 조건으로 `영성'이라는 중간자를 성령님과 성도(신자) 사이에 두고자 했다 해도 이는 우리 믿는 성도의 신앙에 장애물일 뿐이다. 성령님께 직접 다가가기에는 준비가 부족한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서 `영성'이라는 어정쩡한 용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신앙에 실패하기 쉽다.

영성이란 성령님 앞에 다가서기가 벅차서 잠시 숨을 고르고(한박자 쉬었다가) 곧바로 성령님께로 향하는 사람에게는 위로의 뜻을 담았다 하겠으나 `영성'이라는 용어사용으로 만족하고 성령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인생의 낭패와 패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은 사람이 중심되고 성령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중심에 계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 신앙 완성의 유일자(唯一者)이시다. 구원이 오직 예수께로서 오듯이, 부활신앙의 현재화(現在化)는 오직 성령님과의 만남, 그분에게 온전한 복종, 주님이 내 생명 안에서 100%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을 때만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요즘 유행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작은 예수'의 길 또한 영성 가득한 분위기로는 안되고 오직 성령님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을 때만 가능함을 알고 믿어야 할 것이다.〈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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