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살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메시아 대망의 꿈'을 찾아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면서 크게 그 몸을 일으킨 아브라함은 성품이 크고 꿈이 창대하여 당시대 태양신 자식들의 성취에 만족을 못했고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 `아브람아!' 하심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로 화답하여 믿음의 승리를 이끌어 낸 사람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100살에 은혜로 받은 아들, 10여 년 후 모리아에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신 변덕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복종했으며, 그 아들 이삭 또한 아비 아브라함을 닮아 쌍둥이 두 아들 중 잘난 큰 놈보다 작은 놈 야곱을 선택하라신 말씀에 순종하더니 그 아들 야곱의 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의 하나님 세계를 이루어 끝끝내 세계의 중심이 될 가문'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세의 대에 이르러 계약 백성의 한 틀을 만들고, 그는 비록 요단을 건너지 못했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인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하여 자기 사명을 메시아에게로 연결하였다.

다윗은 모세와 메시아 예수의 중간자로, 또 예수 가문의 아비로서 선지자의 사명까지 감당하였으니 그의 시편 110편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는 말씀을 선택하였으니 다윗의 믿음 또한 눈이 부실만큼 빛을 발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 직계 자손인 메시아 예수를 향하여 `내 주께'라 하는 탁월한 믿음을 고백한 인물이었다. 다윗의 아들(자손)들 중에 나타날 메시아 예수를 일컬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선포한 이사야 또한 감히 세상이 감당키 어려운 탁월한, 그리고 찬란한 별들 중 왕 같은 포부를 지닌 선지자였다. 예수께서 이사야와 그의 글을 얼마나 신뢰하셨는지는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 성경은 옛날 약속이라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그 사명을 끝낸 성경(구약)인 줄 착각하는 이들은 구약성경 다시 읽으라.

구약의 주인공들은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로 이어져 오는 진리의 흐름이 탁월한 선지자 시대의 승리로서, 바로 저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제시한 길 따라 그들은 메시아 예수를 얻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무엇을 얻었는가? 새 역사를 얻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오순절 성령 강림절 이후 하나님 나라의 후사(상속자)로 등장한 역사 교회들이 찾아야 할 메시아는 누구인가? 예수라고 하겠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취이고, 미구에 기독교의 메시아로 등장할 재림 메시아 예수의 모형이며 그 실재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의미상으로 볼 때 `메시아 예수'는 아브라함 이후 앞서 열거한 구약의 영웅적인 선지자들이 성취한 그들 구약인들의 메시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구약의 성도들이 신약시대의 자손들을 위한 생명의 떡(요 6:51)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선물한 것이다. 물론 이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등의 탁월한 인물들과 그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구약 성도 전체가 신약시대를 위한 생명의 양식(복음)으로 메시아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그럼, 이 논리로 신약의 성도들 또한 아브라함에서 이사야로 이어지는 복음의 틀을 견고케 하여 다시 오시는 메시아(재림 예수)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하신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 그 다음 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로 대응할 것인가?

그리고 또 다시 성령께서 오셨느냐고 물으면 사도행전 2장에 오셨지 않느냐고 받아칠 것이다. 나는 그러나 다시 묻는다. 사도행전 2장이 어디냐, 그리고 그때 당신이 거기 있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쯤되면 답변이 궁색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답변을 못할 만큼 무식하지는 않다. 사도행전 그 자리가 오늘의 역사현장일 수 있다. 역사현장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성령안에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내게 위협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도 뒤로 물러설 마음이 없다. 개개인이 성령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오시면'이라는 말씀은 기독교가 `삼위일체' 신앙의 완성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삼위일체론 정립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기독론 시비'로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정죄 추방함으로 세계 교회를 반조각 만들었으며, AD 610년 무함마드가 이슬람 종교를 창업할 때 `삼위일체 신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틀림없이 기독교 아라비아 지도자가 될 무함마드를 기독교의 천적으로 만들고 말았지 않는가.

또 있다. AD 1054년 동·서 로마교회가 성령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고 주장한 동로마 성령론과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되 성자를 경유한다고 고집을 부린 서로마(지금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콘스탄티노풀(지금의 이스탄불) 소피아 예배당에서 영원한 결별을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니케아 신조'에 명문화된 동로마교회의 성령론을 배반하고 동·서 로마가 결별하여 아직도 남남으로 지내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더 인용할까? 기독교는 아직 아브라함 만큼한 인물 하나도 내지 못했다. 모세, 다윗, 이사야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기독교는 구약인들이 넘겨준 자산(유산)을 다 들어 먹고, 오늘 이후 기독교의 후손들이 먹고 살아갈 떡을 한덩이도 남기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서 온 떡이 분명하지만 역사속에서 제정신 차리지 못한 기독교 교부, 감독, 신학자, 주교, 대주교, 교황이라는 설익은 지도자들이 자기들도 먹지 못하고 후손들에게 줄수도 없을 만큼 잔뜩 오염만 시켜 놓았지 않은가.

기독교는 19세기 이후 세상을 이겨낼 힘도 능력도, 신학이나 철학마저 다 거덜났다. 파산지경이 되었으니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대한민국처럼 `긴급 수혈'을 받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다. 진리의 깨달음, 그 진리를 상승 발전시킬 수 있는 시대의 진보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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