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일부 신자들이 메시아 재림을 말하고 있다. 막연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습관적인 반복인 것일까? 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의 열망을 내 놓을 수 없는 것일까?

구약인들의 메시아 대망은 하늘을 찌를 만큼이었다. 아브라함을 보자. 그는 75살에 그의 집을 떠났다고 했으나 실상은 5살부터 준비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를 찾기 위하여 5살부터 기도하다가 75살 나이에 드디어 순례(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다. 이는 그의 75살 발걸음이 단호하고, 명쾌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결정적인 승부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리아산 제단에 이삭을 바칠 때였다. 여기 등장하는 비유, 또는 100살의 상징은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 자신이 골고다에서 마지막 제사를 드린다는 상징인데 인간의 역사에서 `제사시대' 또는 `종교시대'를 마감하시겠다는 창조적인 포부를 암시하신 것이다.
도대체 이만한 스케일의 인간 드라마가 어느 세계에 존재했겠는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공동 작품인 `모리아 제물'은 `골고다의 예수 제물'의 형식이고, 이삭이 대속사(代贖史)의 씨앗이면 예수는 열매이고, 시작이라면 완성이며, 알파(Α )라면 오메가(Ω )였다. 이삭이 메시아의 수태(잉태)이면 예수는 메시아 출산이다.

바로 여기에 히브리의 우수성이 있고 아브라함의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로 가 보자. 이사야는 그의 책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한 그의 탁월함을 제시했으니 이는 만세의 으뜸이 아닐까 한다. 어떻게 `임마누엘'을 말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계시라고? 계시인 줄 누가 모르는가. 계시는 분명 계시이지만 그걸 새겨듣는 귓구멍이 `누구의 것이냐'가 아니겠는가.

이사야의 탁월함이 절경을 이루는 대목이 또 있다. 그의 책 53장 초두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하더니 5절에 이르러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로 표현한 `기독론' 또는 `대속론'의 언어기법은 참으로 화려 찬란하며 창조적 지혜마저 번뜩인다. 바로 이 정도의 수준이어야 애를 뱄다, 또는 수태했다가 되는 것이다. 이 만큼한 계시적 안목이 없이 짐승들처럼 사는 자들이면 천년을 기다려봐라.

예수 재림의 날이 오는가. 이사야가 어디서 온 인물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났는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아브라함 이후 구체적으로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사상은 모세, 여호수아, 다윗의 영양소를 통해서 이사야가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 아브라함이 `상징 언어'를 동원 했다면 이사야는 `문자 언어'를 동원하여 인류 구원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는 구약인들의 성취로서 신약인들인 우리의 양식이 되었으니 신약인인 우리 또한 재림 메시아 시대의 미래인들이 넉넉하게 먹을 양식까지를 겨냥하는 인류 구원의 단일 메시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본격화한 인류구원사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먹고 영생을 갈망하는 메시아 예수가 분명하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오늘 기독교인들의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어 있음을 밥술이나 먹고 사는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알고 있다.

어찌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자녀들이 가는 길에 장애물이 되었을까? 장애물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이들이 있겠으나 바로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미처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께 반문했듯이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지를 모르는 빌라도나 예수 주변을 맴돌면서 공것이나 싸구려 부스러기, 곧 종교적 분위기나 느끼면서 겨우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들의 꼴이 피장파장이다.

'애를 배야 애를 낳는다'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지만 불만스러운 이들이 있거든 씨앗을 뿌려야 열매를 얻는다, 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 12장의 논리를 동원해 보라. 기독교 역사 2천여 년을 되돌아보면 신약교회 선진들은 씨앗을 뿌리는 모범이 없었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같은 창조적 앞날을 위하여 천년의 정성을 바쳐야 하는 포부나 구원의 씨앗을 준비하지 못했다. 매우 옹색한 시대의 기독교였다. 더구나 기독교는 아직까지도 `예수는 누구냐?'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초기부터 중기, 그리고 근세 이후에는 거의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유예의 시간이다. 예수는 누구냐에 성공하는 신자들이 등장하면 다시 오시는 메시아의 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신자들은 `이렇게 쉬운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군'이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삼위일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고 그 교회를 발견하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 줄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잘난 체 하면서 큰 소리 치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과는 참으로 먼 거리에 있다.

우맹이요, 소경인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 하셨던 것처럼 그날과 그 때에 대한 기대가 없는 자들.

왜 그럴까? 거저 먹는 떡에만 익숙하기 때문일까? 시나이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와 예수의 5병 2어를 혼동하는 자들이기 때문일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않으니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시고, 또 그가 오시지 않았으니 이 땅에는 사망이 아직도 왕노릇하는 사단의 날이 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가 예수를 지키지 못하니 요한복음 시대 이후 기세가 꺾였던 영지주의와 그들 훼방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를 생명의 메시아로 믿지 않는 오늘의 기독교 책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새 역사(메시아 재림)를 부르기는커녕 역사를 거꾸로 가게 하는 범죄자들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역사의 떡을 맨입으로 먹으려 하지 마라. 이사야 같은 이들은 왕족으로 매우 좋은 조건으로 태어났으나 100여 년 예언자 노릇, 그것도 구약에 나타난 예언자들 중 최고봉인 선지자, 오실 메시아 모습을 99% 정도의 정확도로 보여준 선지자가 톱으로 켜서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의 기독교는 자기 포기의 완전한 희생의 삶을 살아낸 선지자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십자가를 공것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여! 당신의 진리는 곧 거기서 빗나가기 시작했음을 힌트삼아 다시 한 번 돌이켜 봄이 어떨까요.〈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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