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씨알 民衆의 사이에 서서

            
한길사 안암동 사옥에서 전집 완간 기념 강연을 하고 있는 함석헌 선생(1988년).

역사와 씨알

신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마태복음 13:45절에 나타난 “극히 값진 진주하나”는 `예수'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것으로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한 것 말이다.

그 진주장사는 여러가지 진주를 가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사고 팔고를 계속한다. 그러면서 점점 그 소유를 늘려갔다. 그러던 중 어느날 정말 좋은 진주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진주는 이제껏 자신이 사고 팔았던 어떤 진주보다도, 또 지금 지니고 있는 진주를 다해도 버금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진주장사는 자신이 지닌 진주 전부와 그 새 진주를 바꿔 가졌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제껏 이루어왔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바꿔가진 새 진주! 기독교는 그 새 진주, 좋은 진주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 진주장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새 진주를 바꿔가진 것은 예수에게서 천하지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생의 의미, 생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버려졌던 상놈들, 민중들, 씨알들에게 함석헌은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고 그래서 천하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했다. 함석헌을 통해 새로운 의미, 그것도 역사적 의미를 발견한 씨알들은 그 함석헌을 “극히 값진 진주”로 품게 된다. 이름없는 씨알들이 함석헌을 무슨 메시아나 되는 듯이 님, 님이라고 한 것은 결코 그의 사상이니, 철학이니, 종교하는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철저한 바닥살이→민중살이→씨알살이 때문이었다. 함석헌에게는 종교, 철학, 사상이 상놈·민중·씨알의 삶과 유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상놈'으로서의 삶, 민중·씨알로서의 불변·부단의 삶이 종교로, 사상으로, 철학으로 인지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함석헌의 경우에 한한 것은 아니다. 누구의 삶도 사상이, 종교가, 철학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씨알의 삶을 시종일관, 철두철미하게 살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등이니, 능력이니, 대량이니, 경쟁이니 따위의 범죄적인 탐욕을 벗기만 한다면, 하나님나라(새 역사)의 도래가 씨알로서의 삶을 통해서만 열려오는 것임을 명지(明知)하게 될 것이다. 일체의 세속을 거부한 상놈의 삶, 민중의 삶, 씨알의 삶이야 말로 사상이요, 철학이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씨알론은 위대한 철학, 위대한 사상, 위대한 종교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함석헌의 현상적인 것들의 초월은 논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말이다.

함석헌의 일생을 통해 이같이 몸으로 전하는 메세지는 역사의 밖에 있던 이른바 민초(民草)들을 역사 안으로 불러들였고, 함석헌의 삶을 함석헌의 것만으로가 아닌 우리들 상놈들, 민초들, 씨알들로 공유(公有)하게 한 것이다. 구약성서의 한 기자가 애굽의 폭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한 모세를 일러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선 중보(仲保)라고 표현했거니와 함석헌은 그의 90년의 삶을 역사와 씨알의 사이에서 확실한 중보자로 살았다.


씨알들에게 들려진 복음


역사와 씨알 사이에서 32.105일!

걸음걸음마다 씨알과 부둥켜 안고 쏟은 눈물에 젖은 사람, 그래서 씨알은 주저함도, 머뭇거림도 없이 그를 불러 바푸(Bapu)라 한다. “검둥이의 아들로 났거나, 누렁이의 아들로 났거나 임금의 집에서 났거나, 안방에서 났거나, 갈보집에서 났거나 내가 사람의 자식인데서는 털끝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다. 내가 나를 위해서 내게 당해진 역사의 짐을 버젓이 지리라. 그러면 생명의 님 앞에 어엿이 살 것이다”.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땅”에 버려진 `프토코스'(허리 굽히고 사는 사람들)들에게 주는 그의 메세지이다.

“하나는 안방에서 나고 하나는 문간에서 날때 분명히 상전과 종의 차별이 있는 듯 하지만, 그것은 옆에서 구경하는 저희들의 생각 속, 제도 속에 있는 것이지 그 생명들에게는 있을 리 없다. 상전의 자식이 먹는 것 저도 먹고 싶어 하고, 그가 지껄이면 저도 지껄이고 싶어지지 종의 자식이라고 그러지 못한다는 천성은 없다. 예수는 거룩하고 나는 욕심을 못 면했을 때 서로 딴 종류의 사람인듯 하지만 그것은 사회제도로 인해 하나는 자유인으로, 하나는 종으로 나게 되듯 이 인생이라는 꼴에 따라서 되는 일이지 그 밑 바탕에서 다를 것은 조금도 없다”(`물 아래서 올라와서' 전집4. p. 81).

함석헌의 이같은 메시지들은 역사의 주변부가 아닌 밖으로 내쳐진 것들에겐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씨알을 진정(眞情)으로 대접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씨알이면서도 씨알임을 모르는 채 역사의 외인(外人)으로 내쳐져 있던 무리들이 아주 희미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기이(奇異)하게 들여오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불처럼 지쳐 쓰러진 상놈의 영혼들, 민초들의, 씨알들의 영혼들을 일으켜 꼿꼿이 서게 했다.

씨알들은 감격했다. 진실로 씨알들을 믿고 역사의 중심으로 안내해 준 참 길잡이를 만나서였다. 바닥살이들이 받은 은혜가 있다. 감동하는 것이다. 가진 자들에게 내린 벌이 뭘까? 무감각, 무감동이지. 함석헌은 그가 스스로 겪고 전하는 “3·1운동의 의미”는 씨알들로 고마움에 통곡을 금할 수 없게 한다. “…3·1운동은 이제 그 잠자던 나라의 소리였다. 어째 그 나라가 깼나? 씨알의 가슴에 열렸기 때문이다. 왜 열렸나?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역사에 民衆이 제 대접을 받아 본것은 이 三·一운동이 처음이다. 말을 바꾸어하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때에 와서야 처음으로 완전히 민중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갑신정변, 갑오경장이 다 실패한 것은 민중에 부르짖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다. 힘은 民에 있는데 그 운동을 꾸미던 사람들은 아직 옛날 봉건식의 머리였다. 그러므로 군벌의 구테타. 암살 같은 것으로 일을 해보려 했다. 거기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제 3·1운동에서는 인텔리층이 민중을 향해 겸손했다. 그러지 않고는 아니될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 민중이 다 일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들을 주인으로 부르는데 아니 일어날 리가 없다.

민중은 부르면 듣는다. 정치가 겸손해서 이 민중에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일은 못한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우리의 역사에서 한 시기를 짓는 사건이다. 그 이전의 역사는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 이제부터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하는 민(民)의 역사다. 그 전에 혁명도 있고 반항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급의 하는 것이었고 군인의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民衆이 자각해서 하려는 것이다”(`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p. 82, 83, 1964 三中堂).


깨어난 씨알들은 감격했다. 그리고 환호했다. 한결같이 건달패, 불한당으로 몰려다니던 음침한 뒷골목의 패거리들이 자신들이 주역이 되는 역사의 새편을 짜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실로 위대한 변화요 승화였다.

“누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런 일을 본적이 있느냐?(이사야 66:8). 그렇다. 함석헌의 위대는 오직 씨알을 역사의 복판에 불러냈다는 것이다. 함석헌이 뭔가? 그도 역시 예외없는 부분이요, 불완전이요, 미완성아닌가? 그도 역시 구속이 요구되는 죄인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해도 영원히 역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소위 정사(正史·政事)라는 것으로부터 내침당했던 것들 곧 그 상놈들, 상놈들인 민중들, 민중들인 씨알을 지극히 대접해 주었다는 것. 그래서 새 역사의 구현을 저해하는 모든 지배세력과의 결전에 전사의 삶을 살게 해주었다는 것 때문이다.


바푸(Bapu) 함석헌의 가슴

함석헌에게는 태생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품는 가슴이 있었다. 너댓살 되던 해에 “`혼의 아구트는 소리'를 들은것 같았다”는 아이 함석헌의 여나므살 되던 때의 일로 “외밭에 깉어있던 참외”이야기가 있다. 함석헌의 어머니는 쉰이 지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국문을 배워 성경을 곧잘 보았지만 젊어서는 글자 한 자 모르는 이였다.

그러나 사리판단에는 밝았고, 그 아래로 두살 아래 누이동생이 있어 일찍 석헌애기의 젖을 떼게 되어 어머니는 늘 석헌이의 젖 오래먹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두고두고 이야기를 했다. 누에를 쳐서 명주짜기를 일흔이 넘도록 해서 30년 변함없이 명주옷을 짜입혔는데 석헌네 집의 명주는 씨가 먹혀 지역에서 알아줄 정도였다. 그 어머니의 석헌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로부터 함석헌 평생에 잊을수도 씻을 수도 없는 비수(匕首)를 받게 된다. `외밭에 있던 참외 하나'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열네살 이전의 어느 해였는데 외밭에 깉어 있는 참외하나를 보아두고 더 익거든 따먹으리라 했는데 누이동생이 어느새 먼저 따먹어버렸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후에 “내가 아들이요, 그것은 계집애임으로 으례 내게 특권이 있지 감히 제가 손을 대려니 생각을 아니했던 터임으로 시비를 걸었다. 우리집 형제가 둔하지는 않아서 남한테 꿇라는 것이 없었는데, 그 동생만은 좀 둔해서 평소에 어머니도 좀 불만해 하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는 `얘 그건 사람 아니냐? 입이야 마찬가지지' 하셨다면서, “얘 그건 사람아니냐? 입이야 마찬가지지” 하신 그 말이 자신의 가슴에 칼처럼 찔렸다고 술회(述懷)했다. 함석헌에게 일생의 좌표인 평화를 준 사람은 일자무식의 어머니와 조금은 둔해서 어머니도 불만해 하던 덜된 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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