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언제쯤 다시 계시의 날을 허락하실까? 구약의 시간에 주신 계시의 시간과 신약의 시간 차가 왜 그렇게 많았을까? 아담에서 세례 요한까지, 아니다 말라기까지로 계산했을 때 약 3천 6백여 년이라면 신약은 세례자 요한에서 정경 수립기까지 약 350여년이 된다.

그렇다면 신약의 계시가 머무시던 시간은 구약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아 참, 이 생각이 떠오른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원사 또는 구속사(救讀史)의 사건과 신약의 구속사 사건 기록 또한 90%와 10%의 차이를 내고 있음을 본다.

다시 말하자.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방식이 구속, 곧 대신 갚아주심, 대신 해결해 주심의 법칙을 기록한 내용들이 사건별로 계산해 볼 때 신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약에는 창세기 3장의 가죽옷 비유, 아벨과 가인 사건, 노아의 홍수는 물론 아브라함의 이삭을 모리아에 바치기(창 22장)는 물론 아사셀 숫양에게 죄 짐 지우기, 모세의 홍해, 여호수아의 요단강, 다윗의 회개와 눈물,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등 그 숫자는 지금 열거한 분량보다 훨씬 더 많다. 이에 비하여 신약에는 바울의 논문식 해석부분과 요한복음,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잠시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는 사건은 `기독론'의 기본조건이고 보면, 기독교 신자들이 구약성경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곧 기독론 이해의 취약성과 연결되는 것 같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눔에서 기독교는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계시기간을 말해 보자. 구약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수천년인데 왜 신약은 정경수립기(4세기 중반)에 계시가 그쳤을까? 계시의 문을 닫는다고 하나님께서 언제 말씀하셨을까?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카타콤시절(AD 312년까지)에만 순수와 생명의 열정이 있는 운동이 가능했다. 그 이후는 ①기독교의 로마국교화(AD 392년)로 기독교의 순수성 상실 ②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의 이단정죄 추방을 시도한 3차 에베소 세계대회의(AD 431) 음모 ③기독론과 3위1체론 부실로 말미암은 이슬람 종교 허용(AD 610) ④이슬람에게 지중해 기독교 기반을 절반쯤 빼앗긴 로마 기독교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를 통한 무리한 교세확장(AD 764∼814), 샤률마뉴는 세례를 받으려느냐, 아니면 칼이냐고 위협하여 기독교 기반을 넓혔고 그의 인명살상의 극치는 어느날 하루에 작센족 4천명의 목을 자른 일로 유명하다. ⑤끝없는 성령론 시비로 동서 로마교회가 다투다가 AD 1054년 동서로마의 결별 ⑥십자군 전쟁의 수치(AD 1096∼1291) ⑦교황권 분열과 아비뇽 유수(AD 1309) ⑧종교개혁과 농민 반란기, 그리고 재세례파 탄압 등의 살상(AD 1525) ⑨신·구 기독교 30년 전쟁과 ⑩프랑스 영국간의 100년 전쟁으로 치닫는 기독교 역사는 크게 부끄러운 사건들로 말미암아 좌절의 연속이었다.

물론 기독교의 인류사를 향한 기여도는 크고도 많지만 과오 또한 맞비교가 된다. 그래서 절반의 승, 또는 절반의 패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역사과정에서 `계시 단절'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어떨까? 내 의견이 생소하게 들릴까? 계시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닫았다면 어떨까? 그리고 계시의 문은 닫았는데 `성령강림의 문'은 왜 열려 있을까?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답변할 용기는 물론 자격 역시 없다면 하나님께 직접 여쭙겠다. “하나님 아버지, 계시의 문은 왜 닫으셨는지요.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닫으셨다 하시는가요? 그럼 왜, 삼위일체의 한 위이신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의 구원사에 계속 간여하시는지요? 성령 하나님이 창조적인 구원사역을 예수님의 시대나 사도, 속사도, 교부시대나 다름없이 동일한 권능으로 구원사역을 계속하신다면 계시의 말씀 또한 계속 허락하셔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속히 답변해 주세요.”

이는 기독교 역사의 현재적 비극을 (잘)알고 있는 자의 고통스러운 호소이다. 분명 계시의 역사를 단절시킨 행위는 교부시대의 오만한 속단이었을 수 있다. 계시의 단절은 인간에게 산소공급의 차단과 같은 성격의 장치이다.

하지만 `정경수립기' 과정의 고통스러운 시대에 대한 이해는 한다. 마르시온(Marcion)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구약 무용론, 즉 정경은 바울의 글 13권과 누가복음을 포함한 14권이라는 망발 등 특히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적 행위과정을 생각할 때 아다나시우스의 선언과정(AD 367)과 힙포회의(AD 393)에서 마무리짓는 단호한 결단을 잘 알고 있다.

성경말씀을 보자. 요한복음 16장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며, 13절에서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나와 있다.

12절과 13절의 간격이 문제의 해결점이 되겠다. 12절과 13절의 간격을 어떻게 해석하려는가? 그리고 `성령' 해석의 완전성은 `삼위일체' 해석에서 마무리 된다고 볼 때 성령론이 언제쯤 완성되었을까?

니케아회의(AD 325)에서 그 초안이 나왔으나 동·서 로마교회는 수백년 동안 시비를 계속하다가 AD 1054년에 그들이 서로를 저주하며 결별했으니 기독교는 1054년까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정립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상당수 성령과 함께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겨 두어야 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21세기 중턱에 와 있다. 재림시대를 마무리 해야 할 초읽기에 몰려 있는데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재림시대는 언제쯤 오는가?

기독교는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교부시대의 권위로 정경확립을 했고, 말씀기록과 계시의 종결이 4세기 기독교의 결단이었으면 21세기 기독교가 계시의 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결의를 해주어야만 성령께서 말씀계시의 시간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말씀의 시간으로 우리 기독교를 인도하시면 기독교의 재림준비기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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