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서의 선교현장 돋보기(17)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영토였던 이곳이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것은 1971년이었다. 건국 당시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지역이기는 하지만 세속주의적인 공화국의 형태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1988년부터 이슬람 강경 무장세력이 세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종교적 강경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나라의 정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첫 번째 쿠데타는 1975년이었다. 이 쿠데타로 초대수상으로 당시까지 집권하고 있던 셰이크 무지브루 하르만 수상이 살해되고, 지아울 하르만 장군이 집권하게 되었다.

지아울 하르만은 자신의 집권기반을 굳히기 위해 이슬람 고위 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일정부분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즉 헌법 38조가 개정되어 제헌헌법이 표방하고 있던 세속주의 노선을 삭제하고 종교적인 신조를 추구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정치 참여를 허용한 것이다. 이는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는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게 된다.

두 번째로 지아울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민족주의개념을 주류 종족인 벵갈족만의 혈연적 민족주의가 아닌 방글라데시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을 하나로 묶는 영토적 민족주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영토개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보니 같은 벵갈족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서부에 사는 벵갈족과 방글라데시의 벵갈족이 개념적으로 분리되는 문제도 발생했다. 어쨌든 이때부터 방글라데시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크게 완화되는 순작용은 있었다.

세 번째로 세계 이슬람국가들과의 종교적 연대 강화방침을 법제화하여 이슬람의 색채를 분명하게 하였다. 그가 종교를 명분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의 단결을 호소한 이유는 지지기반과 정권의 존립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정치적인 목표와 함께 힌두교에 기반을 둔 인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도와는 차별화된 아이덴티티의 개발이 필요했고, 그 중요한 요소를 종교적 차별화로 본 것이다.

이 같은 국내외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정부가 종교의 정치 참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민간수준에서 활동하던 많은 이슬람 단체들이 속속 정치세력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들 초기 이슬람 정치세력들과 정치에 관심이 있던 이슬람신학자들은 정치적인 기득권을 선점하기 위해 서로 선명성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만큼 방글라데시를 완전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오게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방글라데시의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며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파키스탄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친파키스탄파의 재등장이다. 이들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과정과 1972년에 발생한 파키스탄군이 방글라데시 시민 몇 사람을 살해한 사건 등을 통해서 정치적 입지를 거의 상실했던 세력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슬람주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그러한 성향의 정당을 기반으로 정치무대에 재등장했다. 이들은 사사건건 강경한 이슬람율법과 종교를 내세우며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문화와 인사, 그리고 이슬람을 외면하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이 같은 강경우익 이슬람주의자들은 다수의 침묵하는 이슬람신자들에게 이슬람신자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의 이 같은 정치적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고 이를 기반으로 1978년에는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이라고 하는 이슬람우익민족주의 정당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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