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유일신앙(唯一信仰) “참”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평생을 함께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던
     성산 장기려 선생(왼쪽 두번째)와 함석헌 선생(왼쪽 세번째).

함석헌의 말, 함석헌의 글은 실로 폭풍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고 간에 가만두지 않았다. 뒤흔들고 쳐내고 발본(拔本)을 했다. 그같은 그의 말, 그의 글 중심엔 언제나 상놈, 민중, 씨알이 있었다. 함석헌에겐 이 씨알이 곧 그리스도였다. 물론 그에게 그리스도로서의 이 민중이 `절대'였다는 것은 아니다. 씨알은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는 존재요, 범죄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 마지막 신뢰의 대상은 여전히 씨알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 실존이 곧 씨알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씨알을 믿었다. 민중의 이름을 씨알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면서는 더욱이나 그랬다. 목사요, 신부요, 승려요 하는 것들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도 불당도 도대체 함석헌에게는 헛개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한 사람을 알아서 36년 노예살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라고까지 예찬했던 그 우찌무라, 그 무교회, 후에는 “앞으로 올 인류의 새 종교라면 퀘이커와 같은 형태가 아닐까”하면서도 “퀘어커주의가 내가 열망하는 새 종교는 아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함석헌에겐 믿음의 대상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함석헌의 그 하나님은 `신앙=축복'을 절대의 틀로 만들어버린 `한국교회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말해봤댔자 그의 소리는 이단의 소리에 지날수 밖에는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함석헌에게도 `한 믿음'이 있었다.

'역사에서의 그리스도인 씨알', `씨알만이 그리스도이신 역사'라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함석헌의 사상이자 철학이요 종교였다. 여기서 소위 이제까지 종교라는 것들과의 사이에 대접전을 피할수 없게 된다. 씨알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에서 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소위 정통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씨알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물론 교회주의 입장에서 또는 체험신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예수만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겠지만, 역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 역시 그 역사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위대한 종교일수록, 위대한 인격일수록 철저한 역사의 산물이 아닐수 없는데 천상천하, 동서남북, 고금의 모든 역사의 주체는 곧 씨알이었다. 그 씨알이라는 존재 밖에서 어떤 역사도 있은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 있어 그 씨알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래서 씨알을 역사의 그리스도라 일컫는 것이다. 어떤 역사도 이 씨알을 주(主)로 모시지 않고는 역사일 수 없다. 역사적인 예수, 역사적인 석가, 역사적인 공자 없이 하니님의 역사는 가능할 수 있지만 상놈·민중·씨알 없이 하나님의 역사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타락해도, 범죄해도 그 씨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못 나간다. 사람 지으셨음을 탄식하며 온 천하에 재앙을 내려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쓸어버리면서도 다시 그 `씨알의 씨'만은 지켜내셔야 했다. 그 씨알을 통해서만 그 궁극적 실존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어서였다. 이것이 함석헌의 종교의 핵심이었다. 함석헌은 씨알이 역사의 그리스도라는 이 한 진리의 역설을 수호하기 위해 세상에 왔고, 세상을 살았다.

이것이 그가 1901년 3월 13일 세상에 와서 1989년 2월 4일 이 땅 위의 삶을 청산하기까지 32,105일, 90평생을 정말 이름 없는 씨알로 살아야 했던 이유였다. 함석헌의 삶, 그것은 신통하게도 시종일관 맨 사람으로의 삶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민초이기를, 민중이기를, 씨알이기를 기도했고 실로 놀랍게도 그 응답을 받고 갔다.


함석헌이 말하는 3·1운동의 의미

함석헌에게 있어 3·1운동은 결코 운동이 아니었다. 참을 지키자는 싸움, 참을 이루자는 싸움이었다. 함석헌의 사상, 철학, 종교의 밑바닥이 씨알이라 했고, 거기서 비롯된 것이라 했지만 하늘로부터 허락된 그 위대한 선물 `씨알'은 그의 유일신앙인 `참'에서 아구(牙口)터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3·1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나라가 약소국가라는 것 때문에 강대국의 철권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불가한 것이지만 함석헌의 항일운동은 국가주의의 차원도, 애국의 차원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 `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평생을 두고 함석헌을 이끈 이 `참', 함석헌이 붙든 이 `참'이 함석헌을 3·1운동의 증인이 되게 했고, 드디어 `참'이 3·1운동을 통해 씨알과도 만나게 됐다. 함석헌은 3·1운동을 민주투쟁(民主鬪爭)으로 규정한다.

“不亡不爭하는 것이 民이다. 그렇기 때문에 天命이 거기 내린다. 내릴 수밖에 없다 … 李朝가 우리 오천년 역사 중에서도 가장 더럽게 고스란히 망한다 했지만 그렇게 망한 이유는 민중의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분해 일어섰다면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망했다 해도 역사가를 울리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성을 사람으로 알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그것을 제 나라로 알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 바로 말한다면 일본 사람에게 망한 것은 이씨네 정부지 나라가 아니었다. 나라는 망했다면 벌써 그 이전에 망한 것이요, 그냥 있다면 합병 뒤에도 씨알의 가슴 속에는 변함없이 조건없이 있었다. 3·1운동은 이제 그 잠자던 나라의 소리였다. 어째 그 나라가 깼나? 씨알의 가슴이 열렸기 때문이다. 왜 열렸나?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民衆이 제 대접을 받아본 것은 이 3·1운동이 처음이다. 말을 바꾸어 하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때 와서야 처음으로 완전히 민중을 향해 부르짖었단 말이다. 갑신정변, 갑오경장이 다 실패한 것은 민중에 부르짖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다. 힘은 民에 있는데 그 운동을 꾸미던 사람들은 아직 옛날 봉건식의 머리였다. 그러므로 군벌의 쿠데타, 암살 같은 것으로 일을 해보려 했다. 거기가 잘못된 곳이었다. 이제 3·1운동에서는 인텔리층이 민중을 향해 겸손했다. 그러지 않고는 아니 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 민중이 다 일어난 것은 이때문이다. 자기네를 주인으로 부르는데 아니 일어날 리가 없다. 정치가 겸손해서 민중에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일을 못한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한 시기를 짓는 사건이다. 그 전의 역사는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 이제부터는 씨알의 역사다. 自主하는 民의 역사다. 그전에도 혁명도 있고 반항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급의 하는 것이었고, 군인의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민중이 자각해서 하려는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p. 82∼83. 3·1운동).

그래서 함석헌에게 있어 3·1운동은 민족자결이라기 보다도 民이 주인으로서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민족자주, 민족자결에서 더 나아가 民이 일선주자가 되는 운동이었다는 말이다.

함석헌의 민(民) 그리고 '참'(The truth)

3·1운동은 함석헌에게 있어 천행(天行)의 전환점이었다. “5∼60대의 사람(1964년 현재)에게는 다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3·1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라고 그는 3·1운동을 회고한다. 함석헌이 그토록 3·1운동을 격찬하는 것은 거기서 민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민(民)은 3·1운동의 체험으로 구체화된다. 3·1운동을 거치면서 함석헌의 가슴엔 민중의 바다가 펼쳐진다. 자신을 민중으로 체험하게 되고, 민중임을 고백하게 된다. 민중과 분리된 나, 민중 아닌 나는 이제 존재할 수 없다. “민중의 자리”가 `바닥'인지라 “바닥을 치고 올라간다”는 따위의 말은 그에겐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제는 더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사람, “바닥을 꼭대기”라고 믿어, 그 믿음을 지켜 살아야만 하는 사람, 민중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살다가 민중 속에서 숨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으로 이 민중, 씨알을 만나게 한 것이 `참'이었다. 함석헌은 이 `참'을 그의 유일의 신앙으로 고백했고, 이 `참'이 함석헌으로 정확하게 상놈→민중→씨알을 만나게 한 것이다.

죽고 살기로 붙든 그 `참'이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을 함석헌에게 안긴 것이다. 함석헌은 그의 생의 주제를 “하나님과 민중”이라 선언하고 있는데, 그의 하나님이란 시종일관 `참'(The truth)으로 증언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그것은 참인가?'를 묻는다. 참에 대한 부실, 참에 대한 무지는 곧 하나님께 대한 부실이요, 무지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본 철권의 억압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3·1운동에 참여했던 평남북지역의 대부분 학생들이 제적을 당했는데,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에 대하여 `잘못했다'는 각서를 쓰면 복교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함석헌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참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옳은 일 아닌가? 그런데 학교에 복학하자고 옳은 일 한 것을 잘못됐다 각서 쓰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는 피를 말리는듯한 중압 속에 묻기를 계속했고, “그것은 참이 아니다”라는 답을 얻는다. 그는 평양고보 복학의 의사를 깨끗이 접었다. 자신의 갈 길을 알 수 없었지만 평양고보 복학이 `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가 `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안일을 버리는 만큼 그 참은 그에게 더욱 위대한 선물을 주었다. `민중'이라는 실체였다. 함석헌의 민중은 그의 `참'이라는 유일 신앙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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