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강태공이 곧은 낚시 강물에 던져놓고 세월을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성급한 마음을 짓누르고, 일어나서 한 번 휘저어 보고 싶은 욕망도 참아내자.

'내가 불을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

예수께서는 오랜날 동안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을 잘 알고 계셨다. 요한복음 8장 56절 이하를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께 `네가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하지 않던가. 이 질문에 예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 하신 일이 있다.

이 말씀의 뜻하신 바가 무엇일까? 역사(歷史)의 이름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긴 호흡법을 길러야 한다. 역사의 한 복판에 늘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너희여, 이렇게 호칭해 본다. 이는 에베소서 저자가 그의 책 2장 20절에 기록해 둔 말씀의 의미를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피력해 보는 것이다. 신자는 역사(歷史, 하나님 세계)를 온 몸으로 짊어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1천만 신자도 감사하지만 그 가운데 역사를 온 몸으로 지고 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기에 은근한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위에 세움을 입은 자의 자격을 포함하여 미구에 오실 메시아의 그 기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세례의 시간'을 기다린다. 나의 그 시간, 내 육신을 골고다나 모리아 만큼의 준엄한 약속의 터 위에 눕혀놓고 각을 뜨고 육신의 진실까지 주 나의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찌 내게만일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영을 안다. 인류를 한 가슴에 품고 저마다 달려와서 자기 경험을 말할 때, 이것 뿐이라고 외칠 때, 심한 고집은 하지 말거라 하시면서 저 마다의 공적을 칭찬하실 때 민망해 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남은 고난 내 육신에 묻어두는 것(골 1;24 참조)이며 움츠려 내 몸 높이를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인 것이다. 아, 그러나 나는 이 마음을 입체화 하려는 정성이 모자라서 아직도 40일 주야 금식시간 예수의 시간처럼 내 주변에 버티고 있는 흉악한 사막의 늑대, 미친개들, 그리고 사단의 자식들 뿐이지만 이 모두가 성숙해가는 내 인생의 교사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은근한 마음으로 내게 허락하신 연륜(또는 사명)을 익혀가는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이른 시간에, 그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그 연륜이 무르익어 갈때까지 기다려, 100살에 얻은 자식 모리아 제단에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를 수 있는 날의 아브라함처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신 말씀이면 내게는 감사요 은혜가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자들아, 연륜에 머문다 하거든 그래 푹 익어 넉넉하게 되는 날까지 기다리자.〈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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