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론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는 말씀이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헐라! 하실 때의 예수님, 6장에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 마셔야 너희 속에 생명이 있다, 하실 때의 말씀 또한 만인제사론의 발언으로 어어가시려했던 분위기였다.

그리고 요한복음 16장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하실 때의 간절함 속에는 무슨 말씀이 들어있을까?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그 뜻을 더 깊이 묻어버리시는 느낌을 주고 있다. 왜, 그리하셨을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러나 스데반이 그때의 예수 말씀을 깨달았다. 요한복음 기록자보다 더 깊은 뜻으로 이 성전을 헐라를 받아들인 스데반은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끌다가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다.

스데반을 제물로 받으신 메시아 예수는 율법사였던 박해자 사울을 불러 스데반의 길을 가게 했으니 역사의 가파른 길목에서 예수는 호흡조절을 하셨을까? 스데반의 Everyday Church가 바울의 Sunday Church로 바뀐 역사기독교의 대반전은 누구의 작품이었을까?

그러나 기독교의 변화는 오늘의 시간을 주목하게 한다. 이미 500여 년 전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의 선언' 실패에 대하여 오늘의 기독교는 어느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마르틴 루터가 만인제사 교리(가르침)를 현실화 시키는 데 과오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역사는 루터의 개혁을 어떻게 볼까?

루터의 만인제사설이 16세기 무대에 등장하자, 독일의 농노계층이 환호하였다. 그들 농민들은 영주들의 노예가 되어 비인간적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바로 그들에게까지 천하 만인들이 단독자의 자격으로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복음이요, 복음 중 복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구라파 역사 위에 신자의 진실을 심지 못하고, 그가 설익은 개혁운동을 하다가 지나간 뒤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개혁, 재세례파 운동, 신·구 기독교 30년 전쟁으로 이어졌고,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구라파의 지성계층을 반기독교, 더 나아가서 공산주의 운동, 반신(反神)운동 등으로 발전하여 유럽 기독교는 무너져 갔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마치 한국교회가 유럽 기독교를 일으킬 것처럼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진실로 잠자는 기독교, 죽어버린 기독교를 살려내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예수 십자가에 함께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

자기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개혁자의 자격이 없다. 루터는 당시 영주들과 농민반란군 사이에서 `영주편'을 선택함으로 자기 목숨은 건졌으나 16세기 기독교 개혁의 기회를 절반의 개혁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구나 루터의 개혁이 실패한 개혁임에 동의하지 않은 기득권측, 로마교회측, 세속적 기독교 때문에 종교개혁(기독교 개혁)은 좌절의 시대에 묻혀 있다고 해야 하겠다.〈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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