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아시아시대 〉15〈


       한때(7세기경), 네스토리안들의 기도처. 현재는 이슬람 수도원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은 하나, 황제도 하나, 종교도 하나를 선호했다. 그가 막센티우스를 제압하고, 로마제국의 일인자가 되면서 보여준 자신감이었다. 그는 하나의 제국이요 유일한 황제의 품위를 앞세웠으나 기독교가 하나되지 못하여 골머리를 앓았다.

카타콤기의 기독교는 신앙의 순수 앞에 모든 사악한 것들이 제거되는 줄 알았는데 `아리우스 논쟁'을 통해서 나타난 `단성론과 양성론' 시비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제국을 바로 잡아가기 바쁜 때에 단성론과 양성론으로 나누어진 기독론을 통일시키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일명 니케아 공의회(AD 325년)를 소집했다. 니케아는 비두니아의 제 2도시였으며, 황궁도시인 니코메디아에서 32㎞ 지점의 도시였다. 로마제국 전 영토에서 해로와 육로를 통해서 쉽게 올 수 있는 장소였다. 오늘날 이곳은 터키의 이름으로 이즈닉이다. 가난한 촌락일 뿐인 현재의 모습에 비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지휘했던 당시의 위용은 대단했었다.

황제는 대의원권을 가진 감독(주교)들이 회의장에 올 수 있는 편의 제공, 체류비 제공, 임지로 귀환할 때까지의 편의를 제공했으며, 감독들마다 2명의 비서격 장로들을 대동케 했고, 3명의 하인들까지 넉넉하게 예우했었다. 감독들은 이같은 좋은 기회를 통해서 자기네의 사적인 분쟁들까지 황제 앞에 제시했으나 황제는 이 모든 개개인의 감정은 영원히 잊어버리자면서 그가 받은 탄원서들을 불태워버렸다.

회집에 응한 감독들은 318명이었다. 이는 제국 전역의 감독들 1천8백 여명 중 3백18명은 약 20% 정도였다. 참석지역 감독들도 동방교구가 압도적이고 라틴지역에서는 호응도가 낮았다.

회의시작은 그해 오순절, 또는 황제가 회의장 입장을 한 6월 14일 것이다. 황제 취임 기념일인 6월 25일경에 회무는 마쳤으나 대의원들은 8월 25일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황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회의장에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사자처럼 금은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 크고도 훤칠할 뿐 아니라 날씬한 모습으로 힘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동서방 각 지역에서 로마제국이 핍박을 이겨내며 싸웠던 당대의 감독(주교)들이, 한낱 짐승의 수괴로 여겼던 바로 엊그제까지의 로마 황제 앞에서 정중하고 얌전하게 서 있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었다. 더구나 야수요 짐승의 수령으로 여겼던 로마 황제를 마치 하나님의 천사장 대접하듯 환대하고, 세례조차 아직 받지 않는 황제에게 세계교회 총회의 의장직을 부여하고 있으니 이는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의장의 자격으로 개회연설을 하고,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을 확고히 주장하는 정통신앙 진영은 대의원 숫자는 작았으나 무게감을 느낄 만큼의 중진들이었다. 그러나 금번 회의를 열거한 아리우스파의 단성론자들은 20여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황제의 신임이 두텁고, 황궁의 제사장격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나머지 감독들은 가이시랴의 유세비우스가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그들 중 대다수는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논리가 쉽게 흔들렸다. 정통신앙의 정서를 가졌으나 논리에도 약했고, 일부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들이기도 했었다.

약세였지만 황제의 결정적 신임을 받으며,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 감독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리우스파는 그들의 신조를 제출했다가 강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했고, 그 문서는 갈기갈기 찢어서 불속에 집어던지우는 수모까지 당했다. 이에 18명의 대의원들은 아리우스의 단성론 지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회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내어놓았다. 니케아 신조와 유사한 기독론이었다. 초기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 유행했던 이름이었다. 이는 헬라어 성경이 말하는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를 기피한 `고대 팔레스타인 신앙고백서'인 데 그들은 호모이우시오스로써 `동일본질의(Consubstantialis)'를 거부하는 `유사본질의'를 주장했다.

교리학자들은 말한다.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헬라어 단어는 오직 호모우스오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통 기독론을 거북스러워 하는 유사(사이비) 기독론 신봉자들이 이 단어를 회피하는 것은 21세기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통 기독론을 외면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아리우스파들이 합세하여 고대 팔레스타인 기독론이 대세를 이룰 것 같은 느낌의 순간이었다. 위기였다. 이를 전격 처리하기 위한 황제가 만장일치를 유도할 발언을 준비했다.

그때 스페인 코르로바의 호시우스가 긴급동의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이미 준비된 니케아 신조를 서기 가이사리아 부제인 헤르모게네스에게 낭독케 했다. 호시우스의 행동은 매우 돌발적이었다. 전광석화였다. 대의원들의 분위기가 황제쪽으로 다 기울었는데 호시우스의 결단과 용기가 성자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을 확보하는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대의원들은 말했다. `하마터면 우리의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뻔 했네'.

오늘의 기독교가 AD 325년 6월 니케아 제1차 세계종교회의가 폐회되는 순간 감독(대의원, 주교)들이 가슴 쓸어내리면서 조아렸던 그 말, 여기에 다시 옮겨본다. `하마터면 우리의 그리스도(성자 예수)를 잃어버릴 뻔 했네'의 감격언어를 잘알고 있어야 한다.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하지 않은 이집트 주교 테오나스의 세쿤두스는 아리우스와 함께 일리리아로 추방했고, 아리우스의 서책들을 소각시켰고, 아리무스 추종자들에게는 기독교의 원수들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것이 국가가 이단을 처단한 첫번째 사례였다.

오늘 우리는 아시아 기독교 시대를 열고자 하면서 니케아 제1차 회의 분위기를 여기에 제시하는 필자의 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양성론과 단성론, 이 두 세계로 나뉜 기독교 시대의 앞날을 새삼스럽지도 않게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권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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