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아시아시대 〉16〈


                                 우르무치 중심거리 청진사 모습

니케아 1차 회의(AD 325)는 어정쩡하게 끝났다. 회의 소집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도가 무모하게 작용한 회의였다. 21세기 현재에서 되돌아볼 때 325년 니케아 회의 `기독론'이 황제와 아리우스 합작물인 `단성론'으로 확정되었으면 세계 기독교가 오늘만큼의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이 `들소리신문' 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감동을 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제라도 기독교가 神人兩性論에 기초한 기독론, 그리고 삼위일체론을 정리하여 기독교의 앞날을 순화(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다음 세기에는 예수의 기독교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임마누엘(사 7:14)의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시면서 또 사람이신 예수, 그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본체이심에서 반발짝만 뒤로 물러서면 천길 낭떠러지다. 기독교는 없다. 인류는 기존의 종료로 만족하지 별도로 기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니케아 회의가 `기독론을 통과시키자' 각 지역 감독들은 `하마터면 우리 주님을 잃어버릴뻔 했네!' 하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을 기독교신자 모두는 가슴 속에 꼭 담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회의 분위기가 엉성했다. 제국의 주인이며 절대강자인 황제가 온갖 술수를 다 동원했다가 실패한 회의였기에 미숙한 부분, 잘 정돈되지 못한 부분을 그대로 미뤄두었으니 그럴수 밖에.

사고가 터졌다. AD 431년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다. 이 회의에서 현직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정죄 추방하는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중세초, 세계 기독교는 큰 희생을 지불한 셈이다. 네스토리우스가 기독론 시비에 걸려서 무너지는 사건은 당시 여론에 의하면 로마제국 교회가 절반은 텅비었다고 했다.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가 제국교회로부터 추방되면서 그의 제자들이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 다시 페르시아로 순환하는 아시아 시대를 열었으니 이를 두고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물론 네스토리우스의 `기록론'이 논리상 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타격을 본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교리문제에 개입한 것 자체가 사건을 잘못 이끌었다고 볼수도 있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타격은 제국안에 있는 교회들은 많이 위축시켰고, 신앙과 별개로 교리시비의 악순환을 부르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 사건으로 말미암은 로마제국의 분위기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또한 동서 로마지역의 균열까지 서두르게 되었다. 다시 정리하면 제국안에서 소외당한 세력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를 부추켜서 `이슬람'이라는 기독교 대응종교를 만들었고, 로마의 오만을 견제하려는 내부반발은 동·서 로마의 균열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큰 인물, 그가 큰 인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가 로마제국에서 밀려나니 제국이 반쯤 텅 비었더라, 저잣거리의 유행어들이 말해주고 있다. 그보다도 그는 탁월한 신학자요, 설교자이며, 로마제국 최고의 성직자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다. 그를 상대로 정치적 승리를 얻었던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역사적(현실적) 평가였다.

네스토리우스가 에뎃사(아시아)에서 선교의 깃발을 올리던 해 교황 레오는 AD 451년 10월 8일 제4차 칼케돈 공의회를 열었다. 칼케돈은 보스포러스 해협 경관이 좋은 언덕위의 유페미아 교회에서 열었다. 11월 1일까지 지난 공의회들보다 많은 수의 대의원들이 참석했으며, 회의의 중요성에 있어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능가했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분포는 교황 몫의 대표 2명, 아프리카 감독(주교) 2명을 제외하고는 6백 여명의 대의원들이 모두 그리스인들과 동방인들이었다. 그러니, 교황권은 4명의 대의원으로 라틴계 교회들을 대변해야 했다.

회기 첫날부터 AD 449년의 유티케스 논쟁 및 `강도들의 공의회'를 무효처리를 하면서 둘째 회기에 들어가자 서기가 `낭독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앞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치는데 그것이 선조들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선조들의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믿습니다. 정통 신자들은 그것을 믿습니라'로 이어지는 환호는 합격 바로 그것이었다.

10월 22일 회의 다섯째날 가장 중요한 회기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을 포괄하는 적극적인 내용의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 다음 사항을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분이요 동일한 아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대하여 완전하시고, 인성에 대해서 완전하시다. 그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 곧 이성의 기능을 지닌 영혼과 인간 육체가 엄존하는 분이시며, 신성에 대해서는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대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한결 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그의 신성에 대하여는 모든 세계가 지어지기 전에 성부에게서 낳음을 입으셨고, 인생에 대해서는 이 마지막 날들에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음을 입으셨다. 그는 한분이요 동일한 그리스도·아들·주·독생자로서, 두 본성으로 알려지시고, 혼동도 없고 변이도 없고 단절도 없고 분열도 없으시다. 본성들(Natures)의 구분은 본성들의 연합에 의해서 결코 폐지되지 않고 각 본성의 독특성이 유지되며, 두 본성이 하나의 인격(person)과 위격(hypostasis) 안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우리는 두 인격으로 구분되고 분리된 아들을 고백하지 않고, 한분의 동일한 아들, 독생자, 하니님-로고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되, 옛적에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서 선언해 놓은대로,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 그리고 교부들의 신조가 우리에게 전해준 대로 고백한다”.

-후략-

이것이 칼케돈 공식이다. 실제로 이 문서는 로마(가톨릭) 교구 작품이며, 칼케돈 회의에서 자구 수정없이 통과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언문(신조) 속에 `하나님의 어머니'가 나오는데 이는 네스토리우스 제거의 대가가 될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가 죽던 해가 451년이니 마지막 죽어가는 그가 칼케돈 신조의 소식을 듣고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칼케돈 공식이 선언되던 451년에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위업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

앞서 네스토리우스 중심의 운동은 갈대아 또는 앗수리아 교단의 이름이 함께 하게 되며 페르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그리고 중국 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광역으로 확산되어가는 아시아 기독교의 출현을 이루어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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