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씨알의 소리 창간을 앞두고. 왼쪽으로부터 계훈제(시민운동지도자),
장준하(사상계사 사장), 김재준(한신대학 학장), 함석헌, 이병린(변호사).

함석헌의 유일신앙(唯一信仰) `참'은 그의 생애에서 일체의 마침표(終止符)를 거부한다. 그의 사상·철학, 심지어는 종교에서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교에 있어선 특히 그랬다. 그가 궁극적 실재로 선언한 그의 `참'은 그를 끊임없는 “도상(途上)의 사람”으로 이끌었다.

`참의 영(靈)'에 매인 그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종일관 참에의 이끌림, 그것이 그를 주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항, 반항, 대듦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힘으로 하는 저항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함석헌의 저항'은 참의 영에 이끌려서 된 것이었다. 물론 그가 그 자신의 저항을 일컬어 `골라 든' 것이라 했지만(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p.23, 三中堂 1964) 그의 저항의 삶, 저항의 일생은 전적으로 참의 영에 이끌려서 된 것이었다.

그랬던만큼 그 저항은 치열했고 가열찼다. 지냐, 이기냐?, 되냐, 안되냐? 하는 계산이 그의 싸움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니'할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오직 하나. `참의 영'에 이끌려서였다. 그는 그가 유일한 은사였다는 이승훈 만큼이나 조만식(曺晩植)을 높였다. 그가 조만식을 크게 높였던데는 조만식의 `아니' 때문이었다. 그는 조만식의 회상에서 그의 '아니'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위 5도연합회의(五道聯合會議)라 할때 나도 平北의 간부의 하나라는 이름으로 나갔었는데 가보니 그렇게 보려해서 그런지, 눈에는 선생이 `슬픔의 사람'으로 보였다. 할 수가 없어 그러지, 할 수만 있다면 붙들고 실컷 울어드리고 싶었다. 다른것도 그렇거니와 소위 신탁통치 문제가 나왔을때 어떠했을까? 사람이 아무리 자신이 있다 하여도 무슨 어려운 문제때 먼저 결정을 내리기는 누구나 꺼리는거요, 자연 좌우를 돌아보는 법이다. 어디 남들은 어쩌나? 그러나 조 선생은 그럴 수가 없었다. 후대역사에 그 결정의 잘되고 잘못됨이 뚜렷이 드러날 이 문제에 당면해, `아니' 해야 옳을 줄을 분명히 알았다는, 전부가 그 반대인줄 아는데, `아니' 한마디 하면 칼이 곧 목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그때 심경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선생은 혼자서 `아니!' 했다. 소련사람이 처음 북한에 들어서자 조 선생은 `조선의 간디'라고 선전했다. 아닌게 아니라 생김생김도 비슷하다면 비슷한 점이 있지만 이것은 누가보나 빤히 소련의 음흉한 정책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 선생이 만일 소련의 의견에 잘 맞추기만 하면 북한의 정권이 온통 자기 손안에 있을 것만은 사실이다. 반대로 만일 그 명령을 아니듣는다면 그 결과가 어찌될것은 물을것도 없다. 그리 생각하고 그 `아니' 한마디를 생각할때에 그것은 벼락보다 무서운 한 소리이다. 그것을 한번만인가? 아니다. 그 후로도 몇번씩이나 그랬다. 김일성 다음의 실력자였던 최용근은 조 선생이 오산에서 안아 길러낸 사람이다. 그는 나와도 동급반이었으므로 잘안다. 그의 말에 자기의 은사이기 때문에 될수록 전향시켜 드리려고 열아홉번 선생님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신의주 왔을때 나와 한소리이다. 그래도 선생님은 만세반석이었다는 것이다.”


함석헌, '아니' 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

함석헌은 세상에 와야 할 사람, 와야만 할 사람이었다. 이제까지의 것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 새 뜻의 세계를 짓기 위해 반드시 이 땅에, 그것도 한국땅에, 한국의 역사속에 와야만 할 이었다. 최용건으로부터 조만식의 `아니'를 전해들은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타는 가슴의 타는 말을 토로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비로소 놀랐다. 그 조그마한 몸속에 그렇게 큰것이 있었던가? 그저 공산당들이 붙어 공격하고 회유하고 공갈하면 그저 가만히 앉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할 말을 다했다하면 다음에 자기는 가만히 `아니!' 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있나? 죽이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이지마라 하기는 참 어렵다. `조 선생은 어찌 됐을까' 하고들 묻지만 물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죽기로 결심하고 든 어른을!”

함석헌의 감격해 마지않는 조만식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그 `아니'에 있었다. 함석헌은 새 종교, 새 역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그 `아니'에서 말미암는다고 갈파한다.

“일은 다른데 있지 않고… 민중을 일깨워 제 속에 있는 것을 찾아가지고 용감하게 서도록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니'하고 죽어보여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기다!(그렇다)' 하기 위한 것으로 하는 것은 땅에 붙은 짐승, 하늘을 지향하는 혼을 가진 사람에겐 이 세상은 `아니다!' 하기 위한 것이다. `기다' 하는 모든 철학, 거짓철학, `아니다' 하는 철학 참 철학. `기다' 하는 종교 사탄의 종교, `아니다' 하는 종교 하나님의 종교.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온것은 `기다'당 때문이 아니고 `아니다' 당 때문이다. …때로는 역사가 한 사람의 한마디에 말린다”(전집4, p.174∼175).

필자가 함석헌을 바-푸(Ba-pu)라 부르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함석헌의 `아니' 함 때문이다. 함석헌은 거의 한세기에 이르는 그의 평생을 그 `아니'로 살았다. 그로 하여금 그렇듯 격렬한 `아니'의 삶을 살게 한것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같은 바보의 평생을 살게 했을까? 그는 스스로 그 자신을 바보새라 불렀으니….

그 `아니'의 인생, 바보새의 삶을 살게 한 것이 이미 말해온대로 `참'이라는 유일신앙이었다. 거룩하기 그지없는 `참의 영'께 매여서였다는 것이다. 참은 그의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서의 마침표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돌아 볼 수도, 내려다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나아가고, 그저 올라가고 아예 그것은 그에게 운명이라 해야 옳았다. 아, 죽기 위해 온사람! 그래서 필자는 그 사람 함석헌을 바푸(Ba-pu)라 부른다.

함석헌은 여섯 단락으로 된 구조의 그의 시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와 여섯번째 단락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흔들 그 한 얼굴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에겐 어떤 것도 `참'보다 클 수는 없었다. 참이냐 아니냐 보다 그에게 더 큰 물음은 없었다. 스물넷에 동경고등사범에 유학하게 된 함석헌은 한해 먼저 같은 학교에 와있던 학우 김교신을 통해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인 내촌(內村)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 내촌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성서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 지극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가 얼마나 내촌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가는 그의 글 “하나님의 밤길에 채어”가 증언해 준다.


내촌을 넘어, 유영모를 넘어


“내가 처음으로 갔던 그날(우찌무라의 성서강좌에-필자주) 그는 예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이 강한 그는 `이것이 참말 애국이다' 하면서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나는 지금도 그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여 계속해가는 동안 오랜 번민이 해결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찬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전집4, p.217).

함석헌의 우찌무라로부터 받은 감격을 일제 36년의 종살이와 상쇄할 만한 것이었다는 표현은 거센 반론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어째든 그것은 우찌무라가 함석헌의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케 한다. `저항'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평생의 싸움의 대상에 뚜렷하게 자리한 그 일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함석헌은 서서히 그 우찌무라의 허물을 벗는다. 그것이 `참 자아'의 현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 설수 있게 하는 것은 `내 모습' 뿐이라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확신 때문이었다.

“골리앗을 때려 넘겼기로서 조약돌을 비단에 싸서 제단에 둘거야 없지 않은가? …세상에 조약돌 섬기는 자가 어찌 그리 많은고! 바울바울, 어거스틴 어거스틴, 루터 루터, 칼빈 칼빈, 우찌무라 우찌무라, 그게 다 조약돌 비단에 싸두는 것 아닌가?”

내촌의 제자 함석헌은 내촌에게서 벗어났다. 함석헌이 내촌에서 벗어난 것은 함석헌에게 내촌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 크고 높은 영원한 것을 찾아오르려는 `참의 순례' 때문이었다. 그가 또 한 사람 `스승'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동양철학의 거인으로 일컬어지는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이다. 인생이니, 뜻이니, 영원이니 하는 말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에게서도 벗어난다. “나는 선생님과 역사관이 달라.” 함석헌이 그가 사랑하는 한 제자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전의 그의 한몸처럼 느끼던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함석헌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참'인지라, 그는 쉴새없이 주변을 흔들어댔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종내에는 그가 속한 기독교에마저 반기를 든다.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까지도 드디어는 `이단'이라 하면서, “함석헌씨는 회개하라. 지옥은 있다”며 압박을 가했다. 희한한 것은 그같은 교계를 향한 함석헌의 자세였다. 대체적으로 교계의 조금은 개성적(個性的)인 인사들이 자기 주장, 자기 입장, 자기 해석을 하다가 `이단'이라는 지적을 당하게 되는 데, 그럴때 그 인사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나는 이단이 아니다”라는 것이고,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온갖 논리들을 동원하기에 급급한데 함석헌은 이단운운 하는 세력에 대한 자세가 동서만큼이나 달랐다. “이단? 못되어 걱정이다”했다. `참' 외에 어떤것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들으라 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그 사이에 소용돌이 쳐오르는 인간의 회리바람이여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오 나로 새끝을 들게 합소서.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끝이 있으리요
그것은 교회주의 안경에 비치는 헛개비니라
미움은 무서움 설으고 무서움은 허깨비를 낳는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너머'의 `대선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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