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1936년도 오산학교 1학년 갑조반 담임이었던 함석헌 선생과 학생들.

함석헌에 대한 그 아버지 함형택(咸亨澤)의 신뢰와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조용하면서도 의젓하고, 어쩔때는 간데없는 바보인데 어떤때는 칼 같은 석헌을 아버지 함형택 씨는 결코 범상히 여길수가 없었다. 아들 하나 있는게 어떤 때는 `저놈이 과연 함씨가문을 이을 수 있을까?" 싶게 멍-한 구석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오히려 그 멍한 모습이 미구에 어떤 큰일을 저지를 것 같은 신비감을 갖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열일곱에 한살 위인 황부자집 딸을 아내로 맞아 바로 이듬해 큰 아들을 갖게 되는데 그 이름을 국용(國用)이라 했다. `함석헌은 스물두살이 되던해 집을 떠나 오산(五山)학교에 보궐 편입학해서 2년, 이어서 4년간 동경고등사범에 유학하게 되어 아들 국용이는 어린시절을 할아버지의 훈육아래서 자라야 했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훈육하면서 마치 전가의 보다(傳家寶刀)처럼 쓰는 말이 있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너희 아버지가 그러더라”였다.

함석헌은 실제로 아버지께 더할 수 없는 위로요, 기대요, 희망이었다. 아버지 함형택 씨의 가슴에 큰놈 함석헌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진귀한 보화였다.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명문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뜻을 같이(同志)해 아들로 그 가시숲 같은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게 했다.

그러나 석헌을 향한 아버지의 동지심(同志心)이 그렇듯 갸륵하다 했다해도 평양고보 학생이기를 깨끗이 접어버린 아들 석헌의 배후에 그 아들을 통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역사'를 시작하시려는 `절대의지'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알지 못했다.

필자가 함석헌을 `바푸(Ba- pu)'라 일컫기에 추호도 머뭇거리지 않는 것은 이같은 함석헌의 `참'에 대한 애절한 순종 때문이다. 외아들로 나신 아버지는 큰아들로 난 석헌에게 가문을 걸다시피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는 반드시 부자가문을 이루겠다거나, 어느 정도쯤은 힘을 갖고 소리를 쳐보겠다거나 하는 이는 아니었다. 철저히 정직했고 철저히 의로웠다. 거짓스러운 것, 불의한 것, 오만한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석헌의 아버지 보다 훨씬 나이든 이들까지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기골(氣骨)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나이든 어른들은 석헌의 아버지 형택씨를 보고 “씨는 못속여, 함장사 아들인데…” 했다. 사자섬 뿐만 아니라 석헌의 고향인 용천군 일대에는 석헌의 할아버지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함장사의 몽둥이〉로 일컬어지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의 내용이 이렇다.

함석헌이 네살되던 해 일로전쟁(日露戰爭)이 일어났는데, 그 전쟁이전에 석헌의 고향 용암포에 군항(軍港)을 건설할 속셈으로 아라사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양경영의 같은 야욕을 지니고 있던 일본 역시 일로전쟁이 터지자 석헌이 사는 마을 사점의 남쪽끝인 곽곶이에 상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륙한 일군(日軍)들로 인해 하루는 마을이 왈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군인놈들이 여자사냥을 나선 것이다.

처녀들이, 색시들이 온통 이집으로 몰렸다가 저집으로, 다시 저집에서 이집으로 몰려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엔 마을 끝 어느 한집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마을의 힘께나 쓴다는 사내들은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찾을수가 없게 됐고, 함께 몰린 사내들은 이제 제 아내, 제 딸이 일본 군인놈들에게 벌겨벗겨져 강간당하는 꼴을 뻔히 쳐다보아야 하는 기가막힌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였다. 웬 한 영감이 뛰어들더니 `이놈들아!', 마치 온동네가 뒤집어질 듯 고함을 치며 그 집 돼지우리의 살장을 뽑아들어 일본놈들을 후리는 것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칼찬 놈들이 돼지우리로 쓴 몽둥이에 질겁을 하고 줄행랑을 쳤다니…. 마을 여자들은 그야말로 아슬한 위기를 벗어났고, 그 이후 〈함장사의 몽둥이〉는 전설처럼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돼지우리 몽둥이 함장사가 함석헌의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다. 그 아들 곧 함석헌의 아버지 역시 옳곧은 분이었다.

그는 마을에 예수교가 들어온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사람이 되지 않았다. 강한 자의식(自意識) 때문이었다. 석헌이 “평생에 허튼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아버지였고 교회에서도 “함의원께서 교회에 나오셔야 마을을 다 전도할 수 있는데…” 하면서도 감히 함형택 씨에겐 “예수 믿고 구원받으셔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사람됨이 너무 의젓해서였다. 그러나 그같은 아버지도 아들 석헌을 조심스러워 했다. 당시 경기고보와 평양고보 출신만은 경성의전(京城醫專)을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특전이 있어 아버지는 석헌의 의전진학, 유명한 전문의, 대를 잇는 의사로 대의가(大醫家)를 이루어 세상에 크게 공헌하리라는 꿈으로 충만해 있었는데, 아, 그 자랑스런 아들놈이 학교에 서는 제적을 당했고, 함의원의 아들 일을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함의원댁 큰아들이 미쳤다더라”는 수군덕 대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 형택 씨는 아들 석헌을 굳게 믿었다. “반드시 큰 녀석이 제 자세를 되찾게 될 것이고 공부도 계속 하게 될 것”이라고. 이제 함석헌의 삶이 다시 이어진다.

남강 이승훈의 오산(五山)을 찾은 것이다. 한동안 아버지는 속상해 했다. 주변에 알아보니 오산학교라는 것이 대학에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다. 해서 “대의가(大醫家)의 꿈이 바스러지는 것 아닌가?” 하는 초조함으로 애닳아야 했다. 그랬다. 함석헌의 삶이 다시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함석허은 이제 전혀 함형택이 아들이 아니었으니. 훗날 함석헌은 그의 오산행(五山行)을 일러 “하나님이 그리 보내셨지” 했고.

이제 함석헌은 그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이제부터의 함석헌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게 된다. 세상의 것들로부터 구별해내어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셔서 미구에 구현하실 상놈세상, 민중세상, 씨알세상의 밑돌을 준비할 `밑사람'으로 말이다.


함석헌, 아무것도 아닌 사람


밭없이 씨알은 아구틀 수 없다. 하물며 밭없이 자랄수 있겠는가? 밭이 문제였다. 그래서 보내진 곳이 오산(五山)이었다. 평고는 함석헌을 키울 수 있는 밭이 아니었다. 함석헌 자신까지도 “소년시절 3년을 `그 속에서'(平高三年·필자주)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못할 행복이었다” 해도(전집4, p.174) 요컨대 평고는 함석헌을 키울 수 있는 밭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세상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정말 하늘의, 역사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이었다.

한국인으로서만이 아닌, 지상인(地上人)으로서 그처럼 역사의 사랑, 하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가 입은 역사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지상인으로도 비할 수 없었다” 말하는 것은 그가 한평생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데 있다. 1901년 3월 13일 세상에 와서 32,105일을 살고 1989년 2월 4일 여든아홉이 되는 해 세상을 떠났는데, 스물여덟에서 서른여덟까지 “오산학교 역사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도 스스로 사직하고 물러났으니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산 것이다.

함석헌은 실로 무엇과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로 살았고, 또 누구와도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자로 갔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디에, 또 무엇에 비할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끝까지 `상놈'이었고, 민중이었고, 씨알이었다. 하나님은 그 함석헌을 키우기 위해 오산을 그 텃밭으로 준비했다.


참의 도장(道場) 오산(五山)으로


오산은 정주읍에서 남으로 8㎞쯤의 곳에 자리한 순촌이었다. 이 마을에 고려시대의 익주(益州)성터가 있고 그 주위 10리길 안팎으로 다섯의 산, 동북쪽에 연향산과 해성산, 서쪽에 제석산(帝釋山), 남서쪽에 천주산(天柱山), 남쪽에 남산(南山)이 있어 오산이라 불렀는데 그 중의 주산(主山)이 제석산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산꼭대기에는 `장군바위'라 불리우는 `큰 바위'가 있어 산정을 넘어오가는 가슴들을 시원히 열어주곤 했다. 그 산을 넘어가면 서해바다를 바라게 된다. 산동쪽 끝에 역시 조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 이름이 `용동'이고, 이 용동에서 북녘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위에서 말한 익주성터가 있어 뒷날 오산학교는 바로 이 성터안에 서게 된다.

설립자는 후에 함석헌이 동학(東學) 교조 최재우 보다 `더 큰 그릇'으로 평가하는(함석헌 저, 이승훈·심부름군에서 심부름군으로 p.405)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熏)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리면 그는 평생을 `심부름꾼'으로 살았다.

“심부름꾼에서 심부름꾼으로”, 그것이 남강의 일생이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보궐편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사촌형 함석규를 통해서였다. 기독교를 마을에 처음 끌어들이고 후일 목사가 됐고, 해방후 공산당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는 형이다. 이제 아버지는 석헌의 마음을 헤아려 평고복교의 욕심을 접고 석헌의 길을 석헌에게 맡기기로 한 터였다.

아버지 형택씨는 희미하게나마 아들 석헌이 “내가 키울 수 없는 자식”임을 터득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산의 편입도 `아니'하지 않았다. “이미 벼슬길, 성공(부자)길로 갈놈이 아닌데 잡아두면 뭐 하겠나?”, 내심 형택 씨는 맘 정리를 하고 “네가 좋다면 가거라” 했다. 아들에 대한 듬직스러움은 여전했지만 보석을 잃은 것 같은 허함은 어쩔수가 없었다. 이렇다 해서 함석헌은 집을 떠나 정주 오산을 찾아간다.

이미 이때 장남 국용(國用), 장녀 은수를 슬하에 거느린 때였다. 착하기 그지없는 석헌은 부모님께 죄 짓는것 같은 마음을 절절히 지니면서도 역시 어쩔수가 없았다. 그의 말대로 그 길은 하나님이 보내는 길이었으니….

그런데 학교라고 찾아간 오산은 학교가 아닌 영낙없는 난장(亂場)이었다. 공립에 명문이었던 3년 동안의 평고(平高)에 익숙해 있던 석헌으로선 아무리 2년 동안의 제적기간이 있었다 해도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학교도, 학생도, 선생도 정말 말이 아니었다.

만세운동으로 평고에서 제적되어 두해 동안 `속이 썩을대로, 썩다'가 찾아온 학교였는데 별볼일 없는 것들만 쓸어모아 놓은 듯 했다. 3·1운동으로 민족주의 소굴로 낙인되어 일본헌병이 불을 질러 없애버린 것을 뜻있는 몇사람들이 “조선놈 키우는 일 멈출수가 없다”며 교사도 없이 학생을 받는 때 였다니 그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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