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서의 선교현장 돋보기(33)

스리랑카의 26년간의 내전이 지난 2009년에야 끝났다. 한때 스리랑카 북서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반군은 정부군에게 몰려 전체 면적 100평방 ㎞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에 갇혀 최후의 농성을 벌이다가 모두 투항했다.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내전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있고,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내전의 시작을 들여다보면 어이 없게도 선진 제국들의 어처구니 없는 탐욕이 그 시작을 만들었음을 보게 된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던 시절,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당시의 인도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의 인도는 물론 스리랑카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까지 포함하는 큰 개념이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거느리면서 당시에는 실론이라고 부르던 스리랑카로부터 차(tea)를 들여오게 되고, 영국인들은 그 오묘한 맛에 빠져들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차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싼 기호식품이었던지라 실론에서 차를 들여오기 위한 재원 마련 방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편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등지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다가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돈으로 차를 구입해서 영국으로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든 회사가 바로 동인도회사이다. 여기에 중국이 반발하고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 공부를 통해 아는 바이다.

어쨌든 영국은 스리랑카로부터 영국으로 가져올 차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대규모 차농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비협조적이었다. 때문에 영국은 스리랑카에 살고 있는 싱할레족의 협력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인도 본토로부터 타밀족을 대거 이주시켰다.

싱할레족 단일 종족의 땅이었던 스리랑카는 영국의 타밀족 이주정책에 따라 싱할레족과 타밀족이 함께 사는 다인종 사회로 바뀌었고, 이는 식민 통치 종료와 인도와 스리랑카가 독립한 후 타밀족과 싱할레족의 반목과 대립의 원인이 된다. 현재 스리랑카의 인구구조를 보면 불교를 신봉하는 싱할리족이 74%, 힌두교를 신봉하는 타밀족이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인구 구조는 타밀족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가져왔다.

타밀족이 본격적으로 분리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1965년부터지만 무장반군투쟁으로 독립 투쟁 노선을 바꾼 것은 1983년부터이다. 1983년 7월 타밀족의 본거지인 자프나 반도에서 정부군 몇 명이 타밀족에 의해 살해된다. 이를 계기로 경찰과 정부군, 그리고 싱할레족이 합세하여 타밀족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당시에 1천 명 이상의 타밀족이 살해되었다.

이에 타밀족은 타밀엘람호랑이무장전선(LTTE)이라는 무장 반군단체를 결성했고, 지금까지 26년째 무장투쟁을 계속해온 것이다.

두 종족 간의 내전의 뿌리가 영국이라는 강대국 국민들의 기호식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면, 내전을 지탱하는 이면에는 인도와 중국이라는 신흥강국의 욕심이 있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원래 영국 지배 전에는 스리랑카도 인도 땅이었으므로 인도는 평화유지군 파견 등의 명목으로 계속 스리랑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욕심이 있다.

인도 입장에서는 스리랑카의 불안정 상황이 개입의 구실이 되기 때문에 은근히 분열과 내전을 방조하는 측면이 있다. 또 중국과 파키스탄과 함께 인도는 스리랑카의 정부군과 반군 모두에게 무기를 팔아먹음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해 왔다.

어쨌든 내전은 끝났다. 그러나 타밀족에 대한 차별이 가시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불만은 반드시 폭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또 다시 터져 표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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