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반덕 농장에 오르셔서(강원도 고성군 간석면 소천리 소재).


나는 누구인가? 묻는 함석헌

오산을 떠나는 유영모는 “내가 이번에 오산에 다시 왔던 것은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였던가보이…” 했던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선물을 주고 갔다. 하나는 함석헌으로 〈달라지기 시작〉(전집4, p.187)하게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책을 보자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었다.

〈달라지기 시작〉 했다는 것은 〈나를 문제삼게 되었다〉(전집4, p.187)는 것인데 유영모를 만나기까지 함석헌은 아직도 불확실성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3·1만세 사건으로 관립학교 마저 온몸으로 거부하고 열아홉, 스물 2년을 분노와 한으로 살아온 아픈 경험을 가졌다해도, 이미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찾아든 오산이었다 해도 함석헌에게는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옛것'이 있었다. 지적욕구(知的欲求)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열네살, 열다섯살이 되는 두 해 동안 양시(楊市) 공립보통학교 수학, 열여섯에 졸업하면서 곧바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3·1만세 운동으로 평양고보를 자퇴하기 까지 만 3년을 재학하게 되는데, 이 중 특히 평양고보 3년을 자신의 `일생에 잊지못할 행복'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p.68·三中堂 1964).

“소년시절의 3년을 그속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못한 행복이었다”는 그 소년시절의 평고는 사실은 그가 희생을 각오하고 내어버린 곳인데, 그렇게 내버린 곳을 어떻게 후에 그로 하여금 `일생에 잊지못할 행복'이었다고 술회하게 한 것일까? 그가 직접 저술한 그의 자서전을 비롯,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밖으로는 상놈혼, 민중혼이 서린 평양·평안도의 경관(景觀)과 그 역사요, 안으로는 오산학교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과학〉교육이었다.

함석헌은 그렇게 열심으로 다니던 교회를 평양고보를 다니면서부터 그만두게 되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함석헌에겐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심령의 근저에서 〈참〉의 불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해석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교회의 고함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 `국가(日本)는 지존(至尊)'이라는 호통에 `국가가 도대체 뭔데?' 하기 시작한 것, 어떤 경우에도 `절대'니, `완전'이니, `전지전능'이니 하는 칭호를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예외없이 함석헌의 과학적 진리, 그 지식의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회와 일제(日帝)는 한결같이 자유하는 혼을 불허만이 아니라 압박하고 정죄하기까지 했지만 `과학적 진리'만은 어쩔수가 없었다. 이것이 함석헌으로 하여금 후에 “3년 동안을 그 안(평고·平高)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못할 행복이었다”고 술회하게 한 것이다.

함석헌의 기본적인 지식은 평고의 산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함석헌은 자신의 삶의 이유, 생의 지향로선에 있어 제 길을 뚫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답답해 하고 숨막혀 했다. 그는 타고나기를 죽을때까지 `수평선 너머'를 주시하는 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함석헌은 다시 한번 하늘의 은혜를 크게 입게 된다. 유영모를 만난 것 말이다. 그는 유영모를 만나면서 `나'를 문제삼게 되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며 `반성문'을 쓸 것을 끝내 거부하고 자퇴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나기를 민족주의 가정에서 나고 처음부터 교육받기를 강한 민주주의 기독교 학교에서 받았건만 공립보통학교 이태를 거쳐 고등보통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그만 그 정신은 다 잠자버리고 그 저속된 입신 출세주의의 생각밖에는 남는것이 없었다”(전집4, p.126).

그것이 인생일수는 없지만,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허약은 어쩔수 없었다. 그랬던 함석헌에게 구원의 날(1919.3.1)이 날이 왔고, 울어살이 두해를 거쳐 `광야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스승 유영모를 통한 메세지가 그것이었다. 인생이, 참이, 속사람이, 제나가, 몸나가, 얼나가…. 알듯모를 듯한 말들, 말씀들이었다.

함석헌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 나, 나를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스승 유영모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끊임없이 `나'를 묻고 찾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묻는, 물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아닌데도 묻고 또 물어가는 것이야 말로 분명히 함석헌이 받은 은혜였고, 그 은혜는 스승 유영모를 통해서였다.


독서(讀書)의 도(道)에 든 함석헌


함석헌이 입은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책을 보자”는 생각이 터진 것이다. 이제(오산학교를 마칠 즈음의) 터져오르는 지식의 샘은 이전 평고시절의 그것과는 질에서는 물론 양(量)에서도 달랐다. 오산학생이 된 이후 함석헌은 거의 순교적인 학동(學童)이 된다. 학과공부는 물론이고 그의 독서량, 독서범위는 전혀 한정을 몰랐다. 논리를 파고드는 것, 진리를 찾는 것, 그 진리를 체화하기까지 그의 책과의 씨름은 순교적이라는 표현 이외에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32,105일의 생애가 그랬던 것 같이.

이미 그의 가슴에 민족을 품은 스물두살의 청년 함석헌은 이제는 그의 깊고도 넓은 글 읽기를 통해 세계로, 우주로 그리고 시공을 넘어 후에 함석헌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 말까지의 역사에서 평화의 사람으로, 비폭력 저항의 지도자로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게 한 그 사상의 연원인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 괴테, 베르그송, 블레이크, 입센, 칼라일, 투르제네프, 톨스토이, 실러, 로망롤랑, 니체 등의 사상, 종교, 철학의 세계가 그의 깊고 넓은 읽기, 익히기를 통해 그의 안에서 용해되어 새 종교, 새 철학으로 아구(牙口)를 트고 있었다.

특히 함석헌으로 하여금 기존의 국가, 민족, 종교를 뛰어넘게 한 것은 영국의 소설가요, 문명비판가요, 과학자요, 저널리스트였던 헐버트 죠지 웰스(Herbert Geoge Wells 1866∼1946)였다.

함석헌이 이 웰스를 만난 것은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를 통해서 였다. 그때 함석헌이 가졌던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는 일본어 번역본이었는데 함석헌은 이 책을 당시 일본 조도전대학에 유학중이던 박천규(오산학교 동창으로 함석헌 보다 1년 먼저 월남, 한국공군 군의관으로 복무)의 형의 도움으로 우송해 온 것이었다. 그때 그 책값이 우송료까지 포함해 25원이었는데 그때 오산학교의 매달 수업료가 1원50전이었다. 함석헌이 얼마나 책읽기에 열심이었는가를 말해준다.

생각하는 사람


또 한가지, 함석헌에겐 유년기부터 주변으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을 정도의 특이성(特異性)이 있었다. “골돌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조용하고 다툴줄 모르고, 있으나 없는 것 같이 자랐다. 거짓말 따위는 전혀 할 줄 몰랐다. 맞을줄은 알아도 때릴줄 모르는 아이, 뺏길줄은 알아도 빼앗을줄은 모르는 아이, 차라리 꼴찌를 할지언정 1등을 다툴 줄은 꿈에서도 모르는 아이로 함석헌은 그렇게 자랐다. 마치 이사야가 그리는 메시아의 모습과 그렇게 닮을수가 없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이사야 42:1∼3). 시인 윤효는 실제로 함석헌의 소학교 학생시절에 있었던 가슴 찡하게 하는 이야기를 내용으로 시(詩) 〈함석헌〉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새 담임 선생이 오신다고 아이들이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일제히 환호하며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가만히 걸음을 멈추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내달린 길 되돌아 교실로 향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는 말끔히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책상이며 교탁이며 그리고 아이들 책걸상이며 유리창까지 정성스레 쓸고닦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우리나라 서북 끄트머리 용암포 바닷가 소학교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 담임 선생님은 그 환하게 설레는 눈빛 중에서 가장 맑은 한 눈빛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함석헌의 소학생 시절의 실화이다. 이처럼 매사에 꼴찌같은 함석헌에게 전혀 다른 이면(裏面)이 곧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스승이 있었다. 집안의 숙이 되는 함일형(咸一亨)이라는 이었다. 함석헌에게 민족과 애국과 그리고 당당함, 의젓함, 정직함, 제대로(스스로) 함을 가르쳐준 사람으로 함석헌은 그를 일러 `내게 있어 하늘아래 첫사람'이라 했다.

함일형 역시 석헌을 깊이 마음에 두고 아꼈다. 함석헌이 열살되던 해 였다. 평소에 벙어리 같고, 바보스럽기까지 한 석헌이 하루는 함일형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전하고는 아무말 없이 함일형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뭘까? `애놈'이 뭘주고 가는 걸까?” 크게 의아해 하며 봉투를 열었다. 큼직한 한장의 종이를 잘 접어 넣은 것이 있었는데 꺼내 펴보니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다.

그 글의 제목이 “사람이 하는 것 없이 썩어서는 못쓴다”였다. 글 내용 역시 그랬다. “사람이 세상에 올때 거져오는 사람은 없다. 나도 거져오지 않았다. 제대로 될거다.” 함일형은 그 이후 더욱 석헌을 아끼고 감쌌다. 행여 세상에 상할세라, 애지중지 품었다.

함석헌은 어린시절부터 이상스러우리만큼 생각을 했고 반드시 나름대로의 결론에 이르러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의 경우 결론에 이르렀을 땐 그 일은 곧 자신의 존재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되고 안되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저 나갈뿐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 또 생각하고, 기어이 스스로의 답을 얻고 다음엔 자신의 모두를 바쳐 그 깨달음을 제 삶으로 살아 내기에 죽을 때까지 흔들릴줄을 몰랐다. 그의 삶의날 32,105일이 통체로 차생차사(且生且死)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었다.

'후에 보자'라든가, `훗날을 기약하자'라든가 `잘되는 날이 올 것'이라든가 따위의 소리가 없었다. 매일매일이 아닌 순간순간 죽고 살고, 또 죽고 살기를 거듭하는 그에게 장래니, 미래니, 훗날이니 혹은 이상이니, 꿈이니, 비젼(Vision)이니, 엠비션(Ambition)이니 하는 말들은 있을수가 없었다.

오산의 학동이 되어 `주어진 일'로 받은 공부하기, 책읽기 역시 마치 그 일로 자신의 삶을 마쳐야 하는 사람처럼 진액을 쏟아부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마치게 되는 1923년 4월은 오산의 설립자인 이승훈이 3·1운동을 이끌었던 33인의 한 사람으로 4년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1922년 7월) 출감한지 10개월을 채 미치지 못하는 때였지만 함석헌의 헌신적인 수업(學業)자세에 이미 깊은 감동과 함께 크게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오직 함석헌의 그 하고자 함, 되고자 함의 지극함 때문이였다. 이승훈은 함석헌의 유학을 권유했고, 장학금의 주선까지도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배우기'를 정말 갈망했던 함석헌은 학(學·鶴)의 두 날개를 양 어깨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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