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당시의 함석헌 선생(뒷줄 우측의 첫번째).

그러나 이미 '자유'와 '스스로 함'의 의미를 체험한 함석헌에겐 동경 유학이라는게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학문의 욕구는 마치 불길같다 해도 이제부터 함석헌이 도야(陶冶)하게 될 그 학문이라는 것이 일본의 교육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해야만 부모에게 효도하게 되고, 가문도 빛내게 되고 명예를 누릴수 있게 된다”는 일반적인 상식에서라면 평안도 상놈골, 그것도 서북바닷골 `물아랫놈', `감탕물 먹는 놈'으로 자란 주제에 동경 유학이라니, `집안에 용났다'고 야단법석이었을 것이지만 함석헌은 달랐다.

함석헌이 두 다리를 딛고 선 조선, 그 조선의 역사관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값은 자유의 향유(享有)에 있다. 성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지었다'는 말, `창조했다'는 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소위 `창조과학자(創造科學者)'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쟁론하는 반진화론(反進化論)의 주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창조'가 Handmad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초등학교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상식이 되어 있다. 함석헌에게 있어 창조의 참 의미는 하늘과 땅은 물론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것도 예외없이 절대 의지, 곧 뜻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우주의 정신적 진화를 주장하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 함석헌이 데이야르샤르뎅(P.Teilhardde Chardin)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샤르뎅의 목적론적 진화론은 이미 `참'과 함께 또하나 `뜻'이라는 이름의 “함석헌의 유일 신앙”속에 깊이 내재해온 것이었다. 이처럼 창조자로부터 주입된 절대의 의지, 절대의 뜻의 핵심이 곧 자유, 스스로 함 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 나이 스물세살에 이미 성서를 `고쳐' 읽는 힘을 기르고 있었다. 자구(字句)로서의 성서는 많은 오류를 품고 있으며, 성서와(하나님과)의 참 만 남은 성서를 기록한 기자들의 사상과 그 성서가 기록될 때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인 흐름까지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실로 이단으로서의 규정이 당연시 될 그런 성서관을 키우고 있었다.


함석헌의 저항, 뜻에의 순종


함석헌의 잘못된 현상에의 저항은 그의 유년기부터 나타나는데 그 저항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지극히 종교적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위 애국적이라거나 민족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함석헌을 찾는 이들이 아주 크고 깊게 주목해야 할 점이다. 1901년생으로 그가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부터 해방을 맞는 1945년을 맞기까지의 그의 처절한 `항일'을 단순히 민족의 독립,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물론 해방 이후 러시아군과의 충돌, 1947년 월남이후 1989년 2월 4일 그의 90평생을 마치기까지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전두환의 군부정치에 온몸을 저항의 제물로 내던진 것 역시 결코 그에겐 집권은 물론 정치적인 투쟁은 더구나 아니었다. 함석헌에게 그것은 곧 얼의 싸움이요, 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의 싸움을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산을 마치고 동경에 유학 간 첫해 1923년 9월 1일, 세계의 도시 동경시의 3분의 2가 하룻밤 사이에 타버리고, 조선인만 해도 5천명이 살육당했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감옥에서 경험하게 되는 함석헌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건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압축되어온 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냐, 기독교 신앙으로냐 였는데 다음해 1924년 동경고사에 진학을 하게 되고 동경의 유학 중인 김교신을 통해 우찌무라를 만나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기독교 신앙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함석헌으로 그의 나라(?) 구원에 기독교 신앙을 택하게한 우찌무라는 당시의 교리적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이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우찌무라를 통해 경험한 기독교는 함석헌이 여섯살에 교회인이 되어 스물넷이 되기까지 배워온 기독교라는 것과는 생판 다른것이었다. 함석헌은 그의 자서전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p.216, 1983.7.10. 한진사) 그의 스승 우찌무라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

“세상에서는 그를 무교회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는 홋가이도대학 출신으로 저 `얘들아 야심을 가져라'(Boys be o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클라크(Wiliom S. Clark)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입니다(어떤 자료에는 이 윌리엄클라크가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성경강좌를 개설하여 성경을 강의하는데 일본군부로부터 그 강론내용이 불순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지 않는다며 축출령을 내렸는데 그가 일본을 떠나게 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찾아든 청년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Boys be ambitious in Jesus christ”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신문에 보도되기 전 군부의 검열에서 in Jesus christ가 삭제되어 Boys be ombitious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필자주). 미국 앰허스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한 일이 있고, 그의 `나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하는 책은 여러나라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한 사무라이 기질에 자유·독립의 정신이 강했던 그는 교회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수가 없어서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했는데 교회 아니고도 믿을수 있단다고 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인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전통적인 신앙인데 있습니다. …천왕칙어에 대해 경례를 않았다해서 국적으로 몰렸던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나야”


함석헌은 후에 “내 인생에 두번의 비약이 있었다”면서 그 두번이란 오산에서 유영모를 만났을 때와 동경에서 우찌무라를 만났을 때라 했지만 우찌무라도 유영모도 함석헌의 생의 표준은 아니었다. 함석헌의 성장에 유영모와 우찌무라의 적지않은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함석헌에게는 “영원한 나(自我)”가 있어 그 나를 키워가는데 거의 신기(神技·神奇)에 가깝다 하리만큼 귀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여겨지는 `어떤 것들', `누구의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끌어오는 자질이 있었다.

유영모로부터 삶이요, 참이요, 의미라는 것, 우찌무라로부터 자유요, 자주요, 독립이라는 것들이 그랬다. 특히 함석헌이 우찌무라에게서 가져온 것이 자유와 스스로 함이었다. 물론 함석헌은 아무리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것이라해도 `나'를 만들어가는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은 거기 선생님들께 그대로 둬두어야 했다.

유영모의 “새끼치는 일 이외의 남녀간 성교는 짐승짓”이라는 거의 결벽에 가까운 성(性)개념, 우찌무라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라는 전통적인 신앙(?) 같은 것들의 경우다. 함석헌은 `바라보는 십자가'를 거부했다. 유영모에게서 걸러온 참, 우찌무라에게서 걸러온 자유, 자유신앙! 놀라운 것은 함석헌 안에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 모판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이제 그것은 함석헌의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경 유학과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그런데 그 함석헌이 이제 동경 유학을 목표로 시모노세키(下關)를 향하는 연락선을 타야 한다. 그것은 실로 모순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목을 눌러오는 것이었다. 일본 유학! 떠나는 첫날, 첫걸음부터 그것은 싸움이어야 했다. 그때의 심정을 함석헌을 이렇게 술회한다.

“떠나는 첫 걸음부터 문제입니다. 집의 부모와 학교의 선생께 하직을 하고 나올 때에는 `일본'을 가는 것인데 길에서 관리를 만나면 `내지(內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말을 국어(國語)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요해 놓고는 우리더러 뭐라는지 아십니까? `봉야리상'이라고 했습니다. 멍청이란 말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허허 하고, 원수의 나라를 내지, 원수의 말을 국어라고, 시키는대로 하며 입을 헤벌리고 걸어다니니, 멍청이 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참 너무한 짓입니다. 우리 친구 김교신은 “연락선 갑판을 발구르며 조선사람인 것을 알았노라”라고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다만은 그때 일본 유학 간답시고 부산-하관(下關·시모노세키)사이에 왔다갔다 하는 연락선을 들락날락 하면서 망국민으로서 설움을 뼈에 느끼지 못한 놈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 사람과 꼭같은 돈을 내고 하라는대로 국어(?)를 지지거리고, 내지엘 가노라 해도 대접은 짐승대접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함석헌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 천기(天期)를 탄 사람이었다. 대학진학의 준비기간에 벌어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함석헌은 이 대지진으로 빚어진 현실적인 재앙보다도 이 재앙을 악용하는 〈어둠의 영〉들을 투시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함석헌이 만난 일본의 맨사람들, 함석헌을 만나준 일본의 맨사람들(민중들·씨알들)은 함석헌의 조선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결같이 천심같은 인심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목 말라할 때 마시던 물을 나누어 마시고, 배고파 할때 먹던 것을 나눠먹을 줄 아는 참사람들이었다. 틀림없는 하늘의 아들, 딸들이었다. 문제는 국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은 민중과 국가와는 분명히 구별해 생각합니다만은 그때 (동경유학시)도 벌써 두개의 일본을 느꼈습니다. 일본 민중으로서의 일본과 대일본 제국이라는 일본, 첫째것에는 죄 없습니다. 민중은 세계 어디가도, 세계 어느 구석의 물도 물은 물과 섞여 하나가 되는 물이듯이, 다름없는 민중입니다. 죄 있는 것은 그 둘째것, 소위 정치가라는 도둑들의 손에서 노는 국가라는 것입니다”(내가 겪은 關東大震災, 전집4, p.243). 함석헌이 이 민중과 국가를 일도양단, 결정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이 관동대지진이라 불려진 1923년 9월 1일, 동경구입 경찰서 유치장에서였다.

그래서 1923년 9월 1일을 함석헌에게 있어 축복의 날이었고, 천기(天期·天氣)를 탄 날이었다는 것은 民, 民衆(씨알)과 국가와 국가주의를 분명하게 나누어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관동대지진은 소위 국가라는 것의 범죄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사건자체로 마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제국이라는 국가 일본은 일본인민 보다도 국가권력의 유지와 강화가 관심이었다.

최대진도 7.9도로 관동지방 전역과 시즈오까, 야마나시두 현에도 큰 피해를 입힌 이 지진으로 9만 여명의 사망자, 4만 여명의 행방불명 등의 인명손실과 당시 금액으로 65억엔에 이르는 물적손실을 입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밖으로는 한국, 중국의 민족해방 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고, 안으로는 경제공황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사회저변을 흔들고 있었다. 문제는 지진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또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의 전략이었다. 내각은 사건의 수습, 특히 민심의 수습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이를 위한 위기의식의 조성에 재일한국인을 이용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 국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내의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에 있었다. 이 사회주의 세력의 발본색원에 재일조선인을 이용한 것이다.

이 야마모또의 계엄령 아래서 한국인의 폭동설을 조작해 일본 국민들로 소위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게 하여(도쿄에 1,593개, 인근현에 3,689개), 이 자경단과 자원한 군경들로 한국인들을 살육하게 했는데, 학살된 한국인의 수가 정확하다 할수는 없지만 요시노사쿠로(吉野作造)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의 보고에는 6,661명으로, 함석헌은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동경유학생 감동부?)가 조사한 바로도 5,000이 넘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국가주의! 함석헌은 이 대지진의 첫날밤 철창 안에서 좌시할 수 없는 범죄집단으로 `국가'라는 것을 투시(透視)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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